세상을 바꾸기 위한 개인의 노력이 빛을 발하기 위해

2012.07.09 | 행사/교육/공지

녹색희망 개편호로 읽어볼 책이 두 권 있었습니다. ‘노 임팩트 맨(콜린 베번, 북하우스)’과 ‘굿바이, 스바루(덕 파인, 사계절)’ 중 어느 책을 읽을 것인지 고민했습니다. 선택은 의외로 아니 당연한 결과로 ‘굿바이, 스바루’로 결정했답니다. 왜냐면 책 분량이 무려 100쪽 이상 차이가 났기 때문입니다(짐작하신대로 ‘굿바이, 스바루’가 분량이 적습니다). 그런데 이 책들만 가지고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 몇 가지 책을 더 참고했습니다. ‘즐거운 불편(후쿠오카 켄세이, 달팽이)’, ‘세상을 바꾼 자본(박홍규, 다른)’, ‘정치를 말하다(가라타니 고진, 도서출판 b)’ 3권의 책입니다. 후쿠오카 켄세이씨가 책 마지막에 언급한 “부담없이! 즐겁게! 할 수 있는 것부터!”가 각각의 실험에 도전한 사람들의 마음가짐이었습니다. 세상을 바꾸겠다는 거창한 욕심이 아닌, 정말 가능한지 여부를 즐겁게 도전함으로써 1년의 세월을 그이들은 거뜬히(?) 보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부족하다는, 개개인의 자각과 실천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욕심이 오래전부터 제게 자리 잡고 있었기에, 이번 기회를 통해 개개인의 자각이 물줄기를 형성해 거대한 바다로 나아가기 위해 무엇이 필요할 것인지를 살펴보고자 했습니다. 그 해답을 제가 이 글 말미에 내놓을 수 있었으면 합니다만, 쉽지 않겠지요. 그러나 이 길 역시 “부담없이! 즐겁게! 할 수 있는 것부터!”  

제가 정말 멋진 운동이었다고 생각한 것 중에 ‘정토회’의 ‘빈 그릇 운동’이 있습니다. 지금도 계속 진행되고 있고 얼마 전 서울시가 정토회와 내년부터 ‘빈 그릇 운동’ 공동추진을 검토한다는 기사도 나왔습니다. 꽤 많은 사람들이 이 운동에 서약을 했음에도 아직까지 음식물 쓰레기량이 줄어들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던진 적이 있습니다. 녹색연합이 하고 있거나 이미 사회가 그 내용을 받아 개인의 실천을 유도하는 ‘내복입기 캠페인’, ‘자기 컵 갖고 다니기’, ‘손수건 갖고 다니기’, ‘종이고지서를 이메일 고지서로’ 등등도 마찬가지입니다. 눈에 띄는 사회 시스템의 변화를 느낄 수 없기에 개인의 실천은 한계가 있다고 생각하며, 무력감에 빠져 포기하거나, 나만의 실천에 매몰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고 하나의 흐름을 형성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할까요?

사실 이 부분을 해결하기 위한 실험이 지금도 계속 되고 있지요. ‘협동조합’이 가장 대표적 예입니다. 공정무역, 착한여행, 지역화폐 등도 개인의 실천이 사회의 흐름을 만들어낸 좋은 예일 것입니다. 이 부분은 다양하게 확산되고 있습니다. 소셜펀드라고 해서 영화 ’26년’의 제작비를 마련하는 형태로도 나타나고, ‘두개의 문’ 상영관을 늘리는 형태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긍정적 방식은 아니지만, 불매운동도 하나의 흐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직 주류의 흐름을 형성한 것은 아니지만, 언젠가 이런 흐름이 사회의 주류 흐름이 될 것이며, 그에 따라 사회의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는 믿음을 놓쳐서는 안 되겠지요. 그런데 이것이 사회 주류의 흐름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보아야 하며, 무엇을 만들어가야 할까요? 이 질문의 대답을 가라타니 고진의 ‘정치를 말하다’에서 찾아봅니다. 물론 이러한 답을 고진만이 한 것은 아닙니다.

가라타니 고진은 생산양식이 아닌 교환양식이라는 관점에서 문제를 접근합니다. 그는 교환양식으로 증여의 호수제(호혜 : 증여와 답례), 수탈과 재분배, 화폐에 의한 상품교환과 함께 아직 구체화 되지는 않았으나 증여의 호수제를 고차원적으로 회복한 교환양식에서 해답을 찾습니다. 그는 저서 ‘네이션과 미학’에서 그것을 ‘자발적인 상호교환’이라고 명명했습니다. ‘자발적 상호교환’은 이진경씨가 코뮨주의에서 언급한 ‘선물의 관계’에서 이뤄지는 교환이며, “그 사람에게 되돌려 주지 않아도 돼. 답례는 말이지, 이렇게 꼭 앞으로 하지 않고 뒤나 옆으로 해도 돼.”라는 장일순선생님의 말씀과도 상통합니다.

가라타니 고진은 자본이 M-C-M'(화폐-상품-화폐+α)으로 증식하기 위해서는 유통과정을 거쳐야 가능하며, 이 점에서 상품을 소비하는 소비자의 입장을 강조합니다. 자본은 생산과정에서 노동자보다 우위에 있지만, 소비의 장에서는 노동자에 종속된다는 점을 주목한 것이지요. 따라서 노동자는 그들이 가장 약한 입장인 생산 지점만이 아니라 오히려 소비자의 입장에서 싸워야 함을 강조하며 노동운동과 소비자운동을 결부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소비자이면서 동시에 노동자로서 국가나 자본에 대항함과 동시에 그것들에 의존하지 않고 지내는 ‘경제적 어소시에이션(생산=소비협동조합이나 지역통화․신용경제)’를 창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그러면서 이것은 이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자기가 제기하는 것은 “그것들에 대한 의미부여를 바꾸는 이론”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가라타니 고진이 강조하는 자유로운 개인의 어소시에이션은 이진경씨의 코뮨주의와도 상통하며, 장일순선생이 추구했던 세상이기도 하며, 아나키즘과도 맥을 같이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참 많이 돌아왔습니다만, 제가 하는 고민은 콜린 베번, 덕 파인, 후쿠오카 켄세이가 추구한 삶이 개인의 실천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대로 어떻게 나아갈 것인지, 그래서 개인의 실천이라는 물방울이 모여, 물줄기가 되고, 도랑물, 개울물, 시냇물, 큰강물이 되어 바다로 나아갈 것인지를 찾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고진이 이야기했듯 개인의 실천에 대한 ‘의미를 바꾸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의미는 사회적 변혁의 의미를 담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도 개인의 실천은 중요하겠지요.  

개인이 자신의 실천을 밀고나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현재가 갖는 문제점을 정확히 인식해야 합니다. 부당하고 모순된 현실을 깨닫지 않는다면, 글 서두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중도 포기나 개인만의 실천으로 끝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박홍규님의 ‘세상을 바꾼 자본’은 읽어볼만 합니다.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써서 어렵지 않으며, 자본이 바꾼 세상의 참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지면상 옮겨적을 수 없지만 17세기말 쓰여진 ‘포목상의 환희’는 박홍규님의 글대로 “저임금 장시간 노동으로 노동자를 착취하여 지갑을 채우고 부동산에 투기하는 자본가의 자본주의 만세는 17세기 프랑스에서나 20세기 한국에서나 다르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현실에 눈 뜰 때, 우리는 사회에 저항하는, 자연과 인간을 착취하는 현재의 주류 흐름에 대항하는 개인의 실천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며, 개인의 실천을 뛰어넘어 사회 실천을 이루기 위한 행동에 나설 수 있을 것입니다.

변화의 가능성에 회의를 느낀다면 자본주의 발전을 조금만 들여다보면 극복이 가능합니다. 20세기 초만 하더라도 농민의 수가 절대 다수였으나,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시대에서 다시 3차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절대 다수인 시대로 이미 사회가 변하였습니다. 이렇듯 앞으로의 일자리가 기존의 일자리를 넘어 다른 일자리로 나아갈 수 있음은 이미 역사가 증명해 줍니다. 어떤 일자리를 만들 것인지, 일자리의 비율을 어떻게 만들어낼지 이 모든 것이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그 선택은 가라타니 고진이 이야기한 것처럼 생산의 지점보다 소비의 지점, 교환의 지점을 통해 가능할 것입니다.

헬렌 니어링과 스코트 니어링의 삶이 지표가 되었고, 콜린 베번, 덕 파인, 후쿠오카 켄세이의 실험이 시작할 수 있는 용기를 주어, 이제 우리는 세계의 석학들이 이야기하는 자유로운 개인들의 자발적 연대를 통해 사회의 변화를 가져올 시기에 살고 있음을 깨닫고, 다양한 실험을 시작해야 합니다. 그 실험은 기존의 소비를, 화폐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아래 글들처럼 욕망을 다양하게 선택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것에서 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실험 역시 “부담없이! 즐겁게! 할 수 있는 것부터!!!”

“중요한 것은 화폐나 소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도 인정하면서 화폐로는 환산할 수 없는 가치도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느냐 없느냐일 것이다. 시게마츠씨는 더러움과 연약함도 한데 묶은 그 가치가 바로 자기 자신이고, 자연의 순환 속에 생명을 의탁함으로써 그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기의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는 것이, 타인의 삶을 긍정하고 존중하는 것과도 연관된다고. 개인주의를 비난하고, 전체의 이익을 거론하기 시작하면 파쇼는 바로 눈앞에 있다. 그 함정에 빠지지 않고 타인과 공생하기 위한 사상의 핵이, 바로 이것이 아닌가”

“지금의 위기를 극복하자고 하면, 자칫 소비의 기쁨을 전면 부정하고 극단적인 길을 쫓아가려는 경향을 띠고는 한다. 그 함정에 빠지지 않고, 소비사회를 극복한 사회를 구상하기 위해서라도, 시간에는 ‘진보하는 시간’과 ‘순환하는 시간’의 두 종류가 있따는 사고 방식은 유효하다. 진보하는 시간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순환하는 시간으로도 눈을 돌림으로써, 진보하는 시간에만 편중된 현상을 재조명하고, 두 시간의 조화를 꾀하는 것. 그것은 인간의 욕망을 지금보다 더 깊게 만족시켜줄 방법이기도 하다”

-이상 ‘즐거운 불편 중에서-  

* 이 글은 녹색희망0708 기돈의 책베개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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