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브라이슨의 ‘나를 부르는 숲’에는 어떤 여성이 러닝머신을 달리기 위해 2km가량 떨어진 곳까지 차를 타고 간다는 일화가 나온다. 무엇이든 기계에 의존하는 우리의 문제를 여실히 나타낸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나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짧은 거리라도 자동차를 이용하며 어떤 일이든 기계의 도움을 받으려한다. 요즘 광고에 ‘기술이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는 문구는 결코 기업만의 마인드가 아니다.
기계의 힘과 능력은 인간이 할 수 없었던 일을 거뜬히 해 낸다. 산을 깎고 강을 파고 상상도 할 수 없던 높이의 건물을 올린다. 사람들은 기계의 산물들을 ‘편하다’라는 생각으로 계속 발전시켰다. 그러면서 기계에 의존하는 비중이 커졌고 자연과는 거리를 두게 되었다. 자연이라는 것은 오직 ‘이용대상’으로 전락해버렸다. ‘땅은 어머니요 하늘은 아버지’라는 옛 사람들의 인식은 미신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쓴 채 버려졌다. 자연과 괴리된 우리의 이런 인식은 엄청난 파괴를 불러일으켰다. 골프장 건설을 위해 사라지는 숲과 야생동물의 수는 가늠할 수도 없으며, 희한한 논리를 만들어내 진행하는 ‘4대강 살리기’사업은 생명 파괴의 극치다.
이 모든 것이 우리와 자연의 거리가 ‘천만리’쯤 떨어져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닐까. 이 거리를 좁히는 일, 천만리를 백만 리로 다시 십만 리로 그리고 거리를 구분할 수 없을 때까지 가까이 가는 것. 이것은 머리로만 생각해서는 바뀌지 않는다. 자꾸자꾸 다가가 감정을 나누어야 한다. 살아있는 것들에는 기계와 달리 생동하는 기운이 있다. 그 기운들과 교감하면 서로 닮아간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서로 닮아가듯 말이다.
걷자. 그들을 만나러 갈 때 걸어가고, 또 그들 속에서 걷자. ‘걷기’는 인간의 가장 ‘자연’스러운 이동방식이다. 인간은 수만 년, 수천 년간 걸음을 통해 이 세상 모든 것들과 교류해왔다. 땅과 하늘과 숲과 동물들. 걷는 사람은 자연으로부터 우리의 생명이 기인한다는 것을 몸과 마음으로 느낄 수 있다.
‘서울성곽순례길’은 서울 속에서 자연과의 거리를 좁히기 위한 최적의 장소다. 도심의 울창한 숲은 자연과의 교감의 장이 된다. 서울성곽은 옛 사람들의 지리인식을 여실히 드러낸다. 자연과의 교감뿐만 아니라 과거와의 교감까지 덩달아 얻는 장소이다. 서울성곽은 옛 사람들의 ‘풍수지리’라는 이론을 배경으로 만들어졌다. 성곽 안의 옛 시설과 집들도 마찬가지다. 요즘 ‘명당 아파트’니, ‘명당 무덤’이니 하는 것들로 ‘풍수지리’를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진짜 풍수지리는 모든 생명이 조화롭게 살 수 있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인간이 가장 자연스럽게 살아갈 수 있는 장소를 찾는 이론이다. 자연 속 살아있는 기운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는 것이 핵심이다.
따뜻한 햇볕이 내리쬐는 봄날에 북악산에 올라 서울을 내려다보고 있자면 왜 서울이 이곳인지를 알 수 있다. 뒤쪽의 높고 깊은 북한산은 생명의 기운을 끊임없이 전달하고, 좌우의 산들은 큰 바람이 비켜설 수 있도록 도와준다. 멀리 보이는 한강은 사람들을 먼 곳까지 연결시켜주었다. 지금은 제 모습을 잃었지만 도시를 가로지르던 개천(청계천)은 식수를 공급했을 뿐 아니라 하수를 도시 밖으로 빼냈다.
서울성곽 뿐 아니라 걷는 곳 어디라도 의미 있는 장소가 될 수 있다. 근본적으로 걷기가 우리에게 자연스러움을 찾아주기 때문이다. 조금 귀찮더라도 더 걷고, 작고 소박한 것들과 마음을 나누다보면 평소에 느낄 수 없는 기쁨을 얻을 수 있다. 빠른 속도 때문에 지나쳤던 아름다움을 만나게 될 것이다.
함께 해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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