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이 빨간 아이

2004.06.07 | 행사/교육/공지

(사진설명 : 독일 플렌스부르크 대학의 옥상. 각종 태양광 집열기가 설치되어 있고, 실제 건물의 전력을 수급한다.)

볼이 빨간 아이

한 여자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는 그저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친구들이랑 놀기에 여념 없는, 볼이 빨간 아이였다.

그 날도 친구들과 고무줄놀이에 정신 없는데, 한 친구가 이상한 말을 한다.

“너네, 그 얘기 들어봤어? 하늘에 구멍이 뚫렸대”

“구멍? 하늘에 구멍이 있단 말이야?”

물이 넘쳐서 서울이 물바다가 되기 전에 댐을 지어야한다던 시대였기에, 하늘에 구멍 생겼다는 이야기에는 별다른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그래. 지금 하늘에 구멍 생겨서, ‘독수리 5형제’가 출동한다니깐.”

“피! 독수리 5형제가 어디 있냐?”

이 후 친구 말에 속은 걸 알고 화가 났지만, 어른들만 보던 뉴스에서는 진짜 ‘하늘이 뚫렸다’고 호들갑이었다. 머리에 뿌리는 스프레이와 냉장고 속에 있는 프레온가스가 오존층을 뚫었다나, 모라나, 여러 나라들의 대표들이 모여 대책마련에 정신이 없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볼이 빨간 아이는 새로운 충격을 받고 말았다.

우리 반, 대청소도, 친구들이 도망쳐버려 몇몇이 어렵게 했는데, 지구 전체를 구하는 일, 저렇게 공익적인 일에 모든 나라가 동의하고, 함께 방안을 찾기 위해 노력하다니.

유엔 기후변화협약

92년, 브라질에서 열린 리우환경회의에서 채택된 ‘유엔기후변화협약’은 이러한 놀라움과 신선함을 더욱 증폭시켰다. 빠르게 진행되었던 도시화와 산업화로 인해 인류는 과다한 화석연료를 사용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대기 중에 온실가스가 많이 배출되어 균형을 잃은 지구는 점차 더워지고 기후체계에 갑작스런 변화를 가져온 것이다.

그리고 이를 막기 위해 각 국가는 협약을 맺고, 그 동안 경제성장을 위해 온실가스를 많이 배출해 온 선진국부터 의무적으로 온실가스를 감축하기로 합의하기에 이르렀다.

만화에서만 보던, 이상적인 국제사회의 모습이 바로 이런 걸까. 그 아이는 그 약속과 그 약속을 만들어낸 어른 사회에 반하고 말았다.

그러나, 볼이 빨간 아이를 그토록 설레게 만들었던 기후변화협약은 그 아이의 키가 20센티미터가 넘게 크도록, 어떠한 합의도 이끌어내지 못했다. 오히려 온실가스 감축하는 배출권을 돈으로 팔고, 사는 기현상까지 벌어지게 되었고, 몇몇 국가들의 의무감축 거부로 인해 기후변화협약은 협약 자체가 표류하기에 이른다.

10여년이 넘도록 온실가스의 실질적 감축이 이루어지지 못한 가운데, 지구온난화로 인한 기상이변들은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었다. 집중호우와 태풍으로 인한 홍수, 심각한 가뭄과 사막화로 인한 고통이 급습해오고 있으며, 극지의 얼음이 녹고 해수면이 상승하는 등 생각지 못한 이상기후들이 그 아이의 주변에서도 일어나곤 했다.

볼이 빨간 아이가 갈래머리 소녀로, 화장품 냄새를 풍기는 어른으로 성장하기까지도 기후변화협약은 이처럼 10차례에 가까운 회의만 진행되었을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아이는 교통사고를 당하고 만다. 태풍 루사가 휘몰아쳐서 인근 산에 산사태를 야기 시켰고, 불행히도 그 산사태는 그 아이가 타고 있던 차를 향해 돌진했다. 차의 옆쪽이 부딪치는, 비교적 경미한(?) 사고였지만, 그 교통사고는 그 아이의 마음속에 깊이 남게 된다.

병원에서 우연히 읽은 성경책의 ‘한 세대가 가면 또 한 세대가 오지만, 이 땅은 여전히 그대로이다.’라는 구절이 목에 걸렸다. 우리가 참으로 지구에게 못된 짓을 하고 있구나.

점점 심각해지는 기상이변

지난 100년 동안 지구는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더워지고 있다. 지난 만년동안 지구온도가 1  이상 변한 적이 없었던 것을 생각하면 100년 동안 0.6 나 상승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또 100년 동안 가장 더운 해의 기록이 90년대 이후 거듭해서 깨어지는 것을 보면 이러한 지구온난화가 점차 빠르게 진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혹자는 기온이 올라가면 난방비가 절감되어 좋은 것이 아니냐고 되묻기도 한다. 그러나 사람의 몸처럼, 적정한 평형을 이루고 있는 지구에 있어 기온만이 오르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다.

감기에 걸리면 열이 나면서 기침과 두통, 몸살에 시달리는 것처럼, 지구에게 있어서도 기온 상승뿐 아니라, 각종 해양의 흐름 및 지구 생태계 전체에 많은 변화가 생긴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들이 90년대를 넘는 현대에 이르러 더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100년 만에 처음이라는 ‘경칩의 폭설’이 지나가기 무섭게 황사 바람이 휘몰아치고, 낮·밤의 일교차가 10 정도 차이가 발생해 각종 전염병과 감기환자가 급증하고, 봄 가뭄에 벌써부터 농민들은 애가 탄다. 태풍 루사와 매미로 인한 피해들을 열거하지 않더라도, 근래 석 달 사이에 일어난 일들이 이 정도이니 할 말을 잊게 한다.

우리나라는 석유수입 세계 4위, 석유소비 세계 6위, 온실가스배출 세계 9위에 달하는 엄청난 에너지 과소비국가다. 연간 1인당 쓰는 전력도 5800kwh로, 우리의 경제규모 2배를 넘는 일본이나 영국과 유사하며, 연간 에너지 수입을 위해 쓰이는 돈이 320억 달러에 달한다.

정부는 ‘에너지 절약’을 입에 달고 있으면서도, 정작 특소세 인하 등 그에 반하는 정책으로 에너지 과소비를 그간 조장해왔다. 다른 물가는 지속적으로 상승하는 데 반해 전기세 인하는 수 차례 이루어져왔고, 이는 절묘하게도 대형 발전소의 건설시기와 맞물린다.

또 1차 에너지(석유나 석탄, 가스 등 에너지원)를 그대로 사용해야 에너지효율이 높음에도 불구하고, 심야전기를 확산시켜 3차 에너지인 전력사용을 급증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정부정책의 잘못과 더불어 매번 반복되는 ‘에너지 절약’이라는 식상한 구호가 시민들을 지치게 한다. 이제는 지속 가능한 삶, ‘지구’라는 생명체가 살아 숨쉬기 위한, 에너지 효율과 절약이 필요한 시점이다. 하루라도 지구가 편히 쉴 수 있도록, 안 쓸 때에는 컴퓨터 모니터도 끄고, 멀티 탭도 꺼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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