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유롭게, 천천히, 나를 돌아보는 산행

2004.06.24 | 행사/교육/공지

모처럼 여유로운 날 새벽밥을 챙겨먹고 등산을 나섰다. 매표소를 지나 산 들머리에서부터 걷다보니 ‘○○금지, 하지 마시오’라는 푯말이 곳곳에 무척 많았다. 왜 과일껍질을 버리면 안 되는지, 계곡물에 발을 담그면 안 되는지에 대한 설명도 없이 무조건 하지 말라는 빨간 문구가 썩 기분 좋지는 않다. 왜 산에선 이렇게 하지 말라는 것이 많은 것일까?

“어머니의 산, 설악산을 오르다보면 참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서로 밀어주고 잡아주는 가족들, 땀을 뻘뻘 흘리며 마치 내달리듯 산을 오르는 젊은이들로 등산길은 늘 북적댑니다. 그들 모두가 오로지 정상, 대청봉을 목표로 오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상에서만 감동을 얻을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아름드리 고목과 희귀한 식물, 생명의 시원인 습지, 변화무쌍한 햇볕과 구름, 이 모두가 숲을 이루고 있습니다. 정상까지 몇 시간만에 도달했는지 경쟁하듯 오르다 보면 정작 우리가 봐야 할 것들을 놓치기 마련입니다.”

설악산과 그 속에 깃들어 사는 산양 지킴이 활동을 하고 있는 박그림 씨. 숨이 턱에 닿도록 뛰어 오르지만 말고, 천천히 숲도 보고, 구름의 움직임도 보고, 산행에서 자연의 일부분이 되어 가는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라고 그이는 권했다. 그리고 내친 김에 풍경이 좋다는 여러 곳을 모두 둘러보고 가려고 조바심을 내지 말라고 했다.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그저 산이 내 가슴에 와 닿아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는지 가만 들어보라고 했다.  

빠른 것을 좋아하는 우리는 산행에서도 마음이 급하다. 그러나 잠시 되돌아보면 마음의 여유를 갖기 위해 산을 찾은 것이 아니었을까? 여유있게 정상에 올랐더라도 ‘야호’를 외치는 건 곤란하다. 야생동물들이 고함소리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기 때문이다. 새나 물고기의 산란기, 동물의 번식기나 짝짓기 시기에는 사람들처럼 특히 예민해져 있는데, 사람들이 없는 곳을 찾아 이리저리 쫓겨다니느라 알 낳기조차 힘들어한다. 또, 산 속 계곡물에는 1급수에만 사는 물고기들이 있다.
오염되지 않은 곳을 찾아 겨우 깊은 산 속에 숨었는데 거기까지 찾아와 첨벙 뛰어 들면 물고기들은 맘 편히 살 곳이 없어진다. 들어가지 말라는 계곡에 자꾸 들어가면 관리사무소에서는 어쩔 수 없이 철조망을 쳐야 하고, 그러면 풍경은 흉물스럽게 변해 버린다. 정해진 등산로 따라 산의 생김새대로 구불구불 따라 걸으며 자연의 이치도 배우고 여유도 부려보자. 도시에서 생겨난 각박하고, 급한 마음을 산에까지 그대로 가져오지 말고 도시의 습성은 다 내려놓은 뒤 여유로움만 가지고 산에 들자.

준비해간 음식을 맛있게 먹은 뒤에 쓰레기는 물론이고, 과일껍질도 반드시 챙겨 담자. 사람들은 과일에 묻은 농약을 먹어도 금방 탈이 나진 않지만 작은 새나 곤충은 껍질에 배어 있는 아주 적은 농약을 먹고도 목숨을 잃는다. 어느 조류학자가 죽어 있는 새의 배를 갈라보니 과일껍질과 비닐이 그대로 들어 있었다고 한다. 배낭에 컵을 매달거나 라디오를 들으면서 걸으면 뒤따라 걷는 사람들도 괴롭지만 산의 주인들도 괴롭다. 소리에 민감한 동물들은 특히 쇠 부딪히는 소리와 휴대전화 같은 기계음에 민감하다. 정상에 이르렀다고 이 감격을 친구에게 생생하게 전하려고 휴대전화부터 찾지는 않았는가? 진정한 감동은 굳이 말이나 글로 표현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법. 야생동물은 냄새에도 아주 민감해서 진한 화장이나 향수냄새 역시 좋지 않다. 땀을 많이 흘리는 산행에서 진한 화장은 건강에도 좋지 않다.

“산 중턱에서 보면 나뭇가지마다 주렁주렁 달린 표식기들을 자주 만날 수 있습니다. 요즘엔 국립공원마다 등산로 안내가 잘 되어 있어 굳이 산악회 이름이 인쇄된 표식기를 달지 않아도 됩니다. 정말 길을 잃을 것 같은 곳에 딱 한 장이면 충분하죠. 달 때도 나뭇가지가 더 이상 굵어지지 못하게 쫙 조이면 사람의 목을 끈으로 졸라매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표식기를 달고 나면 그 자리엔 숲의 원시성과 자연성이 사라져 버립니다. 내가 다녀간 흔적을 되도록 남기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숲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은 오랜 세월을 묵묵히 지켜왔고, 앞으로도 그 자리에 있을 숲에 대한 예의가 아니죠.”

박그림 씨는 또 산 속에 들어앉아 온갖 쓰레기를 만들어 내는 음식점과 휴게소에서 음식을 사 먹지 말자는 운동을 벌이고 있다. 우리가 사 먹지 않아야 불법음식점도 자꾸 생겨나지 않고, 약초도 사지 않아야 불법체취가 사라지고, 생화를 눌러 만든 액자나 휴대전화 장식 같은 기념품도 더 이상 만들지 않게 된다고 강조했다. 도토리를 줍거나 산나물을 뜯는 것도 좋지 않다. 모든 것은 제자리에 있어야 아름다운 법.

산에 들 때는 그저 몸과 마음의 모든 긴장과 경계를 풀고 가만히 오감을 열어둔다. 눈으로 보는 감동, 코로 맡는 냄새, 입으로 느낀 맛, 귀로 듣는 소리, 피부와 발에 와 닿는 느낌을 가만히 느껴본다. 그이는 산을 오른다고 하지 않고 산에 든다고 했다. 정복자의 모습이 아니라 대자연의 품속에 잠시 쉬러, 그 푸른 기운을 얻기 위해 등산화를 조여 맨다고 했다. 도시의 주인은 사람일지 몰라도 산의 주인은 나무와 풀, 곤충과 야생동물, 흐르는 물과 쌓인 흙이다. 입장료를 지불했다고 해서 주인행세를 해도 되는 건 아니다. 남의 집을 방문할 때 옷을 차려 입고, 선물을 뭘 할까 곰곰이 생각해 보듯 산에 들 때도 손님이 갖출 예의를 생각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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