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 등불이 켜진 우리 골목길로 오세요

2004.09.16 | 행사/교육/공지

이 골목길에 관한 이야기는 어느 신문 한 귀퉁이에서 잠깐 읽은 적이 있었다. 사는 분들의 이름도 없고, 연락처도 없던 터라 지금 무렵이면 장미꽃이 활짝 피었겠구나 하는 상상만으로 어느 골목길을 찾아 나섰다. 강동구 천호2동, 동사무소를 찾아 물어 봐야겠다 생각하고는 지하철을 나서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얼마를 걸었을까? 달려드는 차를 피해 어느 골목에 접어든 순간 우연처럼, 운명처럼 장미넝쿨이 우거져 흐드러진 장미꽃 마을에 이르렀다.

오후 4시 무렵 설린옛1길, 장미넝쿨이 만들어준 시원한 골목길에서 동네 노인분들을 모시고 잔치를 벌인 뒤 뒷정리가 한창이었다. 고소한 음식 냄새가 아직 곳곳에 배여 있었다. 아이를 업은 엄마와 길바닥에 주저앉아 뒹구는 아이들, 딸네집에 잠깐 와 계신다는 백발의 할머니도 활짝 핀 장미 아래에서 쉬고 있었다. 스무 집이 마주 보고 다닥다닥 붙어사는 100미터 가까운 골목길엔 아치형 장미넝쿨이 가득 메우고 있었다. 집집마다 내놓은 크고 작은 화분들과 담벼락에는 연꽃과 농악대, 나무를 그린 벽화들이 골목길의 풍경 속으로 잘 스며 있었다.

서울 강동구 천호2동 461-135번지 일대에 모여 살던 몇몇 사람들은 주말마다 부부동반 산행을 하곤 했다. 땀에 젖은 채 산에서 돌아오던 어느 날, 들꽃을 산에서만 즐길 것이 아니라 가까이에서 가꿔 보자는 이야기를 나눴다. 그 해 97년, 제일 먼저 골목길 청소부터 해야겠다 싶어 회색 담벼락에 페인트칠을 새로 했다. 그리고, 벽화를 그려 넣었다. 무심한 담벼락에 표정을 주고 싶었다. 집안에 갇혀 있던 화분들을 골목길로 내놓고, 조금씩 돈을 더 모아 화분을 사들였다. 그리고 다음해에는 장미를 심고 넝쿨이 타고 올라갈 수 있는 아치형 구조물도 세웠다. 가까이 사는 사람들끼리 일을 나눠서 뭔가 함께 한다는 것이 그저 즐거웠다. 그리고, 제법 넝쿨을 이룬 그 이듬해에는 장미 아래에서 어른들을 모시고 노인잔치를 열었다.

마주 보는 골목길에 들어선 집은 모두 스무 채 정도지만 이층 삼층에 세 들어 사는 사람까지 합하면 모두 50여 집이 모여 산다. 잔치가 있는 날, 앞치마를 두른 안 주인들은 제각기 음식을 나눠 씻고 썰고 요리를 하고, 바깥 어른들은 골목길을 쓸고 화분을 닦고 이웃동네 노인정과 동사무소, 구청을 돌며 어른들을 모셔왔다. 2백 분이 넘는 어른들을 모시는 큰 행사가 되었지만 동네사람들과 함께 하다 보니 따로 단합대회니, 주민 모임이니 하는 행사가 따로 필요없게 되었다. 이 골목에서만 25~30년을 산 네 집이 중심이 되어 시작한 일인데 다른 집들도 두 팔을 걷고 나서면서 말 그대로 동네 잔치가 되었다.

“이 골목은요, 애들이 살기는 천국이에요.”
골목길을 마구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보면서 김씨 아저씨가 흐뭇하게 웃음 지었다. 작은 차 한 대가 겨우 지나칠 수 있는 골목을 아예 ‘차 없는 거리’로 만들었다. 대신 자가용은 행정기관의 허락을 얻어 가까운 공원에 주차시키고 집까지 걸어다니고 있다.
“어려운 일이 아니에요. 처음 마음먹은 누군가가 기쁜 마음으로 골목을 쓸고 꽃을 가꾸면 이 골목 사람들 전부가 즐겁잖아요? 봉사하는 마음으로 시작하면 쓰레기만 쌓여 있던 골목도 정이 있는 곳으로 변하니 그보다 더 쉽고 좋은 일이 어디 있겠어요?”
다른 동네에서도 골목길을 가꾸고 싶다고 하면 언제든 돕고 싶다는 차진석 씨. 흙이 있어 식물을 심을 수 있는 골목이면 어느 곳이든 가능하고, 그렇지 않은 곳이라면 집에서 키우는 화분을 가족들만 즐기지 말고 골목에 내놓은 일부터 시작하면 된단다. 그러다 보면 문을 닫고 지냈던 이웃들의 얼굴이 보이고, 표정이 보이고, 마음이 보이리라.

장미넝쿨 아래서 이런 상상을 했다. 이번에는 동백길, 다음엔 들국화길, 원추리길…. 골목마다 제각기 이름을 가지고 주마다, 달마다, 계절마다 잔치가 이어진다면 우리 사는 이 땅이 더 아름답고 훈훈해지지 않을까? 가만 둘러보자. 거실 한 귀퉁이에서 광합성도 하지 못하고 시들고 있는 화분은 없는지, 골목길에서 이웃 사람들의 환한 웃음을 먹으며 싱싱하게 자랄 화분이 있는지. 이런 싱싱한 향에 널리 퍼져 모든 지구촌 사람들이 행복 바이러스에 감염되는 날을 꿈꿔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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