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치식물과 돌, 재활용 – 권오분 인터뷰

2004.10.22 | 행사/교육/공지

전화통 너머, 그이는 대뜸 양치식물을 좋아한다고 했다. 양치식물이라는 말에 내 머리 속에선 번뜩 큰 산불이 지나고 난 뒤 제일 먼저 고개를 내미는 고사리가 생각났다. 강원도 어느 깊은 산골, 불에 타서 쓰러진 고목들 사이로 부드럽고 강하게 쏟아 오르던 연둣빛 고사리, 그이 역시 수줍은 듯, 웅크린 듯 고개 드는 고사리의 강한 생명력이 못 견디게 좋다고 했다.
양치식물 세미나가 있던 날, 우린 드디어 만나기로 했다. 만나서 광릉수목원을 함께 가기로 했다. 그이의 이름을 알게 된지 어느덧 7, 8년. 그러나 첫 만남이었다. 분주하게 지나치는 버스 틈을 헤집고, 들뜬 마음을 진정시키며 내달린 횡단보도 저 끝에 사진으로만 잠깐 본 적 있었던 그이가 서 있었다. 내가 바로 전화한 그 사람이라고 말하기도 전에 내 손을 덥석 잡았다. 부드럽고 따스했다. 권오분 선생님! 그렇다. 따스한 이야기를 쓰는 권오분 수필가가 아니라 남편 뒷바라지, 아이들 수발로 펑퍼짐한 몸매가 된 권오분 주부가 아니라 내게는 권오분 선생님이라는 이름이 익숙했다.

“목 마르죠? 물부터 마셔요.”
커피향이 살짝 나는, 끓여서 식힌 물이었다. 버스에 오르자마자 물부터 건네주셨다. 목이 마르던 참이라 얼른 받아 뚜껑을 돌려 땄다. 재밌는 건 컵이었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컵이 아니라 작은 발효요구르트 통이었다.
“한번 쓰고 버리기 아깝지 않아요? 작고 단단한 것이 일회용 컵보다 훨씬 좋아 야외로 나갈 때면 이 컵부터 챙겨요. 간편하니까 가끔은 집에서도 써요. 남편이 소꿉놀이하는 것 같다며 피식 웃지요.”
이야기를 듣고 보니 거참 괜찮은 생각이다 싶다. 부피도 적고 깨질 염려도 없고, 잃어버려도 아쉽지 않겠다. 물 한 모금 마신 뒤, 가방에서 내주신 사과 몇 조각과 샌드위치도 먹었다. 이 샌드위치 역시 우리가 아는 보통 샌드위치가 아니다. 흑밀빵 사이에 단무지와 상추, 당근을 마요네즈랑 잘 섞어 바른, 일명 권오분표 재활용 샌드위치다. 집에 남아있는 재료들 중에 ‘먹을 수 있는 것’만 채썰어 넣은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샌드위치, 아삭아삭하고 시원한 것이 생각보다 상큼하고 고소했다.

“회식문화다, 뷔페다 하면서 고급요리를 좋아하지만 모임에 가 보면 음식문제가 정말 심각해요. 체면 차린다고 비싼 음식 시켜놓고 반도 먹지 않고 남기는 걸 보면 어이쿠, 저 비싼 걸 어떻게 그냥 버리나 싶어요. 그래서 저는 외출할 때 우유팩을 챙겨 가요.”
남은 음식을 담아 오는데는 우유팩만한 것이 없다. 팩을 씻어 말려 납작하게 만들어 두었다가 행사나 모임에 갔을 때 남은 음식을 담으면 아주 깔끔하고 간편하다.
“우아한 사모님들 모임에 가면 고급요리들이 나오거든요. 먹다보면 가족들 생각나잖아요? 남으면 몽땅 버리니 아깝기도 하구요. 그때 우유팩에 남은 음식을 담으면 모양도 깔끔하고 많이 담을 수 있는 것도 아니라서 추해 보이지도 않아요. 아주 ‘얌전하고, 거룩하게’ 활용할 수 있어요. 곰국을 끓여서 담으면 빨리 식지도 않고, 탕수육을 담아도 좋아요. 버려도 재활용되니 더없이 좋은 포장지에요.”
집으로 돌아와 챙겨온 음식으로 다시 잔치를 열면서 음식을 남기면 죄 받는다고 강조, 또 강조했더니 가족들이 이제는 귀에 딱지 않겠다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든단다. 그러던 어느 날, 외출했다 돌아오는 아들의 손에 맥주집에서 남긴 안주가 들려 있었다. 남편 역시 모임에서 남은 매운탕을 포장해서 들고 왔다. 전염이랄까, 쇠뇌라고 할까, 이런 가족들의 변화가 놀랍기도 하고 반갑기도 했다.

시장에 갈 때는 장바구니를 들고 간다. 선심 쓰듯 겹겹이 싸 주는 비닐봉지를 받지 않으려고 무던히 노력하지만 주방에 차곡차곡 쌓여 있는 비닐이 있다. 생활정보신문을 포장했던 두꺼운 비닐들이다. 튼튼하고 깨끗한 비닐을 한번 쓰고 바로 버리는 것이 아까워 보이는 대로 챙겨왔다. 포장할 때 쓰고, 김장비닐로도 쓰고, 떡 방앗간 갈 때도 가져간다. 그 뿐 아니다. 멀쩡한 것을 버리는 게 아까워 통이란 통은 종류별로 주워오고, 오가며 쓰레기통도 잘 뒤진다.
“남들이 쓰다 버리는 물건도 아까운 게 많지만 물이 제일 아까워요. 특히 변기에서 그냥 흘려버리는 물과 세탁기 헹굼물을 줄이는 방법이 뭐 없을까 연구중이에요. 그리고, 화장실 변기에 맥주병을 넣어두고, 물 내리는 횟수를 되도록 줄이려고 하고 있어요. 빨래할 때는 양잿물로 만든 비누를 써요.”
그리고 마지막 비눗기 없는 맑은 헹굼물은 마당으로 가지고 나가 텃밭 식물들에게 듬뿍 뿌려 준다. 맑은 수돗물을 그냥 뿌리는 것도 낭비 같기 때문이다. 물을 주면서 마당에 쪼그리고 앉아 꽃밭의 꽃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꽃밭이라곤 하지만 응달이라 적응 못하는 것들은 다 죽고 생명력 강한 것들만 남은 꽃밭이다. 꽃이 시든 자리에 풀들이 차지하고 앉아 시어머니는 늘 풀밭이라고 부르곤 하셨단다.

“사람들은 풀이라고 하면 소용없는 것, 뽑아버려야 하는 것으로 알지만 풀꽃이 얼마나 예쁜지 모르고 하는 소리에요. 더구나 이 시멘트로 갇힌 공간까지 날아와 꽃을 피운 생명력이 얼마나 신기하고 고마워요. 화분의 꽃은 견디지 못하고 죽지만 어디에서 날아온 것인지 알 수 없는 풀이 꿋꿋하게 그 자리를 지키는 걸 보면 참 놀라워요.”
쇼핑을 좋아하지 않는 그이지만 ‘놀이터, 지역구’라고 할 만큼 자주 가는 가게가 있다. 천 원, 이천 원이면 옷 한 벌을 고를 수 있는 재활용가게다. 차곡차곡 걸려 있는 옷 중에서 그이가 좋아하는 옷은 주름이 생기지 않는 옷이다. 아무 곳에 던져두어도 다림질하지 않고 바로 입을 수 있는 옷이 좋다.
“미역 하나를 사면 그보다 더 비싼 플라스틱 통을 주고, 김 하나를 사도 더 큰 플라스틱을 주대요. 참 재밌는 세상이에요. 많이 먹고 나서는 많이 쪘다고 걱정을 하고, 다시 건강기계를 사잖아요? 이런 먹고 즐기자는 외식문화 문제도 심각하지만 목욕문화도 심각해요. 물을 헤프게 쓰는 것도 그렇고, 타월이나 수건을 대충 쓰고는 버리고들 가요. 그것이 또 아까워 주워서 와요. 새로 살 것도 없이 이렇게 주워 쓰기도 바빠요.”

수목원에서 돌아오는 길, 선생님 댁에 들러 같이 비빔밥을 먹기로 했다. 샌드위치를 만들고도 아직 남아있는 야채들을 섞어 맛있게 비벼 먹기로 했다. 떠들썩한 것보다는 조용하게, 저렴하게 먹고 즐기기 위해 사람들을 만날 일이 생기면 곧잘 집으로 초대를 한단다. 외식할 돈으로 장을 봐서 몇 가지 간단하게 차리면 좋은 사람들과 느긋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낡고 오래된 집이라 비가 샐 때마다 수리를 해야하는 집이지만 서울 하늘 아래 이보다 더 편하고 아늑한 곳이 없다. 가스레인지 위에서 압력솥이 ‘칙칙’ 뜨거운 열기를 내뿜기 시작했다. 식탁을 덮은 유리 안에는 한때 지구를 지배했다는 양치식물, 잘 말린 고사리가 얌전하게 들어 있었다.
“저는 돌을 좋아해요. 수천 년 한 자리를 지키는 돌, 자연의 변화무쌍함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돌이 좋아서 들여다보고, 쓰다듬어 보고, 햇볕에 비춰 보면서 지구의 역사를 상상하곤 해요. 돌이 가진 빛깔이 너무 황홀하지 않아요?”

양치식물과 돌, 재활용을 좋아하는 그이, 한때 지구를 지배했다던 양치식물과 태초 원시지구의 역사를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는 돌, 하나밖에 없는 지구의 미래를 위해 ‘우아하고 거룩한’ 재활용을 즐겨하는 그이, 서로 다른 것 같은 이들은 지구와 공존이라는 비슷한 연결고리를 가지고 닿아 있었다. 축축한 음지에서 천천히 생명을 틔우는 고사리처럼, 어떤 변화와 시련에도 흔들림 없는 태고의 돌처럼 그이는 그렇게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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