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을 이어가는 생명의 씨앗들

2004.11.17 | 행사/교육/공지

세월을 이어가는 씨앗들

지방 중소도시로 이사 오니 서울처럼 복잡하지 않아서 너무나 좋았다. 그러나 여기도 도시인지라 여전히 아파트가 주거공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래도 조금만 차타고 나가면 나무들과 꽃 그리고 너울 바람과 그 바람에 함께 흔들리는 풀들이 많았다. 얼마 전에 이웃 집 할머니에게 겹채송화와 겹봉숭아 꽃 얘기를 들었다. 얘기만 들었지 실제로 그 꽃을 본 적은 없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문막 포진리와 치악산 황골에서 그 꽃들을 발견하고는 얼른 씨앗을 받았다. 꽃송이가 정말 풍성한 것이 마치 국화꽃 같았다. 치악산 황골 입구 어느 작은 집 담 곁에서 만난 겹봉숭아의 꽃은 지나가는 이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 꽃은 마치 목화의 풍성함과 장미의 화려함 그리고 봉숭아의 부드러움을 함께 갖고 있었다. 남편은 돌연변이 장미가 아니냐고 처음에 우기더니 가까이 가서 잘 보더니 우리 토종 꽃의 아름다움에 입을 다물고 말았다. 젊은 아저씨가 나와서 씨 받는 일을 허락하면서 하는 말이 자신의 어머니가 해마다 심는다고 했다. 아주 소중한 만남이었다.

씨를 구해다 아파트 베란다 시루에 심어 핀 한송이 채송화 – 이 사진 찍은 후에 왕창 피었음.

겹봉숭아는 씨가 영글 무렵 손가락 굵기의 큰 벌레가 생긴다고 한다. 씨앗을 받을 때 보니 정말 통통한 벌레가 꽃 속에 동아리를 틀고 있었다. 그 벌레를 직접 보고나니 아파트 베란다에서 꽃을 틔우기가 쉽지 않다고 생각했다. 마침 우리들은 겹채송화를 찾아내었다. 겹채송화는 벌레도 없어서 겹채송화 씨앗을 베란다 시루 화분에다 심었다. 노랑과 연분홍을 심었는데 첫 해에는 남의 꽁지 밭에다 심었는데, 남편이 잡초를 뽑다가 겹채송화까지 뽑아내었다. 그대, 하는 일일랑 역시 그렇지, 그래도 간신히 씨앗 수십 알을 건졌다. 채송화 씨 수십 알이라니 정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적다. 새우 눈보다 작은 채송화 씨라서 그렇다. 올해는 그것을 아파트 베란다에서 시루화분에 심었는데 날씨가 추워지도록 예쁜 꽃을 보았다. 채송화 아이들을 생산하려면 벌이 날아와야 하는데, 벌이 날아오게 하느라고 방충망을 열어 놓았다가 집안으로 벌이 들어와 내쫓느라고 애를 썼다. 남편은 몇 년 전에 괴산 어린이 자연학교에 갔다가 벌에 쏘여 죽을 뻔 한 기억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할 수 없이 벌 대신에 아이들이 그림 그릴 때 썼던 그림붓으로 꽃가루를 소소히 묻혀 살살 칠해주기도 했다. 그럭저럭 지네들 사이에서 수정이 되었다. 다행히 내년에 심을 꽃씨를 겨우 얻었다.

가을이 깊어지면 여기저기 많이 돌아다녀야 한다. 씨앗 받기와 그 해의 알곡과 수확물이 시장에도 있고, 들에도 널려있기 때문이다. 창포 씨는 씨앗이 꼭 작은 밤처럼 꼬투리 주머니 안에 이 삼십 알 들어있다. 창포가 많이 돋아난 장소를 꼭 기억했다가 해마다 또는 씨앗이 필요하면 그곳으로 간다. 치악산 중간 자락에 있는 국형사 아래에는 창포가 많다. 문막에 가서는 하얀 채송화를 보고 정말 신기했다. 하얀 채송화를 본 사람은 극히 드물다. 치악산 너머 주천강 따라 강림 가는 길가에 쭉 늘어서 있는 목화꽃 거리는 정말 솜틀집 온 기분이 들었다. 목화씨 받아간다고 뭐라 말하는 사람도 없다. 그곳에서 얻어간 한 줌의 목화솜을 집에 가지고 가서 바늘 쿠션(  )을 만들어서 아직도 쓰고 있다.

겨울 치악산 올라가는 길에 발견한 씨주머니는 참으로 경이로운 자연의 묘함을 보여 주었다. 그 모양은 마치 거꾸로 된 낙하산처럼 생긴 주머니에, 그 주머니에는 씨가 그득 들어있다. 이런 모습은 참 나를  숙연하게 한다. 국형사 절 마당에 수국이 꽃송이 그대로 말라 있다. 꽃이 어떻게 이렇게 탐스럽게 자연 건조되었는지 감탄한다.

울타리콩은 대부분 할머니들이 당신 드시려고 조금씩 심었던 것을 장에 내다 팔기 때문에 많이 구할 수가 없었다. 특히 그해 여름은 비가 너무 와서 콩농사가 형편 없었으니 콩값도 비쌀 수밖에 없었다. 가을에 주변의 5일장마다 부지런히 돌아다녔더니 많은 종류, 별난 종류의 콩들을 구할 수 있었다. 특히 울타리콩은 지방마다 그 모양과 크기, 색깔이 제각각이었다. 울타리콩은 팔려고 농사짓는 작물이 아니라 집에서 조금씩 먹을 거리로서 이 집 담이나 저기 농로 옆에 그냥 무심한 마음으로 심어 놓은 것이어서 그 양은 작지만 손주 녀석에게 줄 용돈벌이로 내놓은 할머니의 손을 거쳐 우리들 밥상까지 오르게 되었다. 농사짓는 작은 아들 손밖에 난 울타리콩 걷이는 고냥 할머니 몫이다. 그리고 내년에 심을 종자 콩을 골라 마루 추마에 걸어두곤 했다. 그렇게 그 씨앗의 생명은 몇 백 년을 이어 오며 종자의 지역적 특이성을 갖추게 되었다.

콩잔치

불행하게도 장에 나온 할머니에게서 이제는 그런 여유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 이런 콩들은 종자 자체가 곧 사라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콩뿐만 아니라 우리 토종 종자는 정말 소중한 것인데 아직 소중함을 잘 모르는 것 같다. 아이엠에프 때 우리나라 종자 회사가 외국자본으로 다 팔려 넘어 갔다고 하는데, 그 사실은 국치일에 버금가는 중대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종자의 소중함을 모르니 답답하다.  

장날 돌아다녀 보면 할머니들이 가지고 온 조그만 보따리들에서 진귀한 울타리콩들이 많이 나온다. 어떤 콩은 만지면 너무 매끄러워서 찰랑거리는 머리결 같다. 이런 콩들을 종류별로 잘 나누어서 말린다. 그러면 벌레들이 나오는데 이 벌레들은 아파트 잔디밭에 휙 던져 버린다. 니들은 거기서 알아서 잘 살라고. 콩들을 잘 말려 실한 것만 골라서 내년에 심을 씨앗으로 더 말려둔다. 우리 아파트 앞에 작은 실개천이 흐르는데 그 개천 둑에 콩 심을 자리를 확보해 두었기 때문에 콩 심을 땅은 있다. 이다. 나머지 콩들은 함께 섞어서 밥에 두어 먹거나 메주 담글 때 조금씩 넣는다. 언젠가 단양 구인사에 아이들과 갔었다. 콩에 관심이 많다보니 콩 파는 할머니들만 눈에 띈다. 그때도 상대적으로 희귀한 쥐눈이콩을 할머니들한테 살 수 있었다.

마음에 두고 있으면 언젠가는 먹는 콩이든지 아니면 예쁜 꽃이든지, 씨앗을 발견하게 된다. 씨앗이 세월을 이어서 보존되는 일은 잘 생각해 보면 정말 신기한 일이다. 그것은 생명을 가꾸는 최초의 일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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