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아이들

2005.03.02 | 행사/교육/공지

아마 50세 전후 세대들은 아빠라는 말 대신에 아버지 또는 아버님이란 호칭에 훨씬 익숙하다. 아버지라는 말은 아빠라는 말이 담아낼 수 없는 엄청난 삶의 역사를 담고 있다. 그런데 그 말을 부르면서 삶의 안타까움이 같이 배어 나오고 있다. “아버지!”, “어머니!” 하고 부를 때, 조금 거창하게 말해서 한국 근대사의 흔적이 묻어 나온다는 말이다. 그 옛날 아버지는 집안에서 호령에 가까운 소리를 크게 지를 수도 있었고, 방안에서 마음대로 담배도 필 수 있었고, 술이 잔뜩 취한 대로 들어오셔도 어머니 앞에 당당하셨고, 바람을 피셔도 다 이유가 있으셨고, 하고자 마음먹으면 밥상도 뒤엎을 수 있는, 그렇게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안방권력의  상징이셨다. 그 앞에서 어머니는 항상 숨죽어 있고, 아이들도 통통거리며 움직이는 모습이 사라지는 그 무엇. 그런가 하면 일제 때, 전쟁을 거치면서, ‘잘살아 보자’ 라는 구호 아래 경제 번영기의 역사를 살아온 한 인간으로서의 아버지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런 아버지 밑에서 아이들은 별 탈없이 그럭저럭 커갔다. 학교에 가면 선생님이 아무리 무서워도 아버지보다는 덜하다고 생각했는지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노느라 바빴다. 실상은 학교가도 틀에 박힌 숙제와 외워야 될 것이 많아서 억지로 따라하는 것일 뿐이고, 역시 신나는 일은 뭐니뭐니해도 친구들과 노는 일이다. 최소한 친구들과는 눈치볼 일이 없었고, 미리 엉기는 일도 없었다. 공부 못해도 공부 못하는 놈끼리 놀면 그만이니까 말이다. 어떤 친구들은 성적이 형편없이 나와서 아버지한테 두들겨 맞고는 공부 좀 해볼라 치는데 막상 공부 좀 하려니 진짜로 되지를 않아서 나에게 하소연을 하곤 했다. 그런데 나는 그 친구에게 할 말이 별로 없었다. 우리 아버지는 공부에 대해서는 일체의 간섭이 없었던 터라 왜 그렇게 때리고 맞는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 친구는 나를 부러워했지만, 한편 나도 그 친구가 부럽기도 했었다. 아예 부모의 사랑이 없어서 혹시 그런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다 쓰잘데기 없는 지난 생각들이다. 어쨌든 그런 시간이 흐르면서 간섭과 사랑이 겨우 종이 한 장 차이일 수 있다는 것을 커서야 느끼게 되었다. 내가 두 자식의 에비가 되고 보니 공부간섭은 참으로 부모의 욕심일 뿐이지만, 그렇다고 간섭을 안 하면 아이들은 사랑의 결핍을 느낄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이제는 너무 지나친 것이 문제다.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는 얼마나 비인간적이었는지, 성적표는 물론이거니와 하다못해 아이큐 검사를 했는데 그 결과를 점수 순서대로 교실 뒷벽에 붙여 놓을 정도였다. 문제는 내가 꼴찌에서 두 번째였다. 시험성적이 꼴찌였다면 나름대로 당당한 모습을 겨우 유지했으련만, 아이큐 결과란 너무나 근원적인 인간의 본성이 확 까발려진 것 같아서 초등학교 6학년의 나로서는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었다. 그때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그 결과를 보여드리지 않았다. 아이큐는 유전적인 것이 대부분일 것이라는 어디서 주어들은 이야기가 있던 터라 정말 이것만큼은 숨길 수 있는 한 숨기고 싶었고, 아버지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이미 다 알려졌는데도 말이다. 그 이후 내가 겪은 심리적 여파는 말하지 않겠다.  

지금은 많이 좋아졌지만 그 당시는 남자아이와 여자아이의 교육적 차별이 심했다. 없는 집안 형편에 진학할 이이들이 있을 때 딸들은 당연히 우선 순위를 아들들에게 넘겨주어야만 했다. 옛날 얘기하자는 것이 아니라 이런 우선 순위의 관행은 예나 지금이나 학교 교실에서도 반복되고 있음을 말하려는 것이다. 아버지로부터 딸들은 순종을 배웠고 아들들은 권위를 배워갔다. 딸은 하고 싶은 공부를 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안고 살았으며, 아들 역시 무엇인가를 해내야 한다는 강박감이 너무나 컸다. 딸은 결혼하여 다른 집으로 출가하기 때문에 아버지와의 관계가 나빠도 떠나있거나 떠나야 할 시간과 공간이 있지만, 아들은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심리적으로 혹은 공간적으로 경제적으로 같이 있어야 한다. 결혼했다면 며느리도 같이 해야한다. 그리고 많은 경우 그 아들도 그 아버지를 닮아간다. 특히 집안에서 별 볼일 없는 권위의식은 어김없이 자식들에게 전해지고 있다.  

아버지에게 복종만을 강요받았던 아들은 그 자식에게도 복종을 강요하는 확률이 매우 높다. 아버지의 폭행을 당하면서 자란 아들은 또 다시 구타하는 아버지가 되기 싶다고 말들 한다. 다정한 아버지 밑에 자란 아이가 다정한 아버지가 된다는 조사결과는 없지만 충분한 심적 근거가 있다. 교육에 의해서 사람이 바뀐다는 생각이 타당하다면 말이다. 문제는 이 시대의 어머니 상이 변하고 있듯이 아버지 상도 변할 수밖에 없는데, 어머니는 자발적으로 변화하려는 움직임이 있는데 반해 아버지는 밀려서 어쩔 수 없이 변해간다는데 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어머니가 더 강하다고 말할 수 있다. 여전히 변하지 않는 아버지가 많다. 아버지의 힘과 권력이 잘 사용되면 좋지만, 잘못 사용되면 어떻게 되는지는 우리가 더 잘 안다. 양성으로 이루어진 사회에서 힘이 센 자는 그 힘을 잘 써야 하고 아껴야 하고 쓸 때 써야 한다. 이제는 남성끼리만 겨루는 사회도 아니고 남성끼리만 어울리는 사회도 아니다. 또한 여성끼리만 겨루는 사회도 아니고 여성들끼리만 어울리는 사회도 아니다 .

이 시대의 아버지는 아버지 자신들이 자신의 아버지 상을 스스로 세워야 한다. 정말 힘든 일이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변화가 그 어떤 변화보다 힘든 변화의 꼭지점에 서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버지의 변화를 이뤄내지 못하면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육의 변화가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요즘 논란이 되고 있는 네이스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아버지의 잘못된 권위를 변화 없이 유지하고 싶은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집안에서 혹은 교실에서 같이 살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에 귀를 기울이는 일에 관심을 덜 두는 사람들일 것이 분명하다. 아버지가 아버지의 자리를 아이들에게 강요한다면, 그 아버지의 자리를 결코 세울 수 없다. 반면에 아버지의 자리를 아이들의 자리에서 찾는다면 자연스레 아버지의 자리는 아이들 마음속에서부터 찾아질 수 있다. 교육도 꼭 마찬가지이다.

아무리 좋은 뜻을 갖고 교육을 한다해도 아이들 입장이 아니라 자신의 관점에서 교육한다면 그것은 아이들에게 지옥 같은 교실이 될 것이다. 집안에서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충고와 설득, 안내와 제시, 아무리 좋은 말을 한다하더라도 아이들 관심과 벗어나는 것은 딴 세상 일 일뿐이다. 여러분들도 아이들 키우고 계시기 때문에 너무나 잘 아실 일이다. 문제는 나도 그렇지만 아는 것과 실천에 옮기는 일이 잘 안 맞는 경우가 많아서 걱정이다. 그것은 진짜 아는 것이 아니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정말 좋은 것인데 왜 저렇게만 할까?” 그리고 또 한쪽에서는 “저런 것도 있는데 왜 이렇게만 하라고 하실까?” 이 두 상황이 부딪힐 때 누가 양보를 하고 누가 이해를 해야 할까요? 옛날 아버지라면 앞의 상황이 지배적일 것이다.  

섬진강 시인 김용택님이 한 말을 따다 붙여 보았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건 연애하는 것과 비슷해요. 내가 진심으로 다가가야만 아이들도 나를 좋아하고 신뢰하죠. 교육은 가르치면서 배우는 건데, 그러려면 애들 마음이 나한테 와야 하고, 다가와서 내 손을 잡도록 해야 하거든. 그래야 교육하는 맛이 나고 하루를 사는 맛이 나요” –

그래서 아무리 좋은 일을 해도 권위와 압력이 존재한다면 좋은 일이 아닌 것 같다. 교육은 결과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과정을 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의 교육은 그와는 정반대로 나아가고 있으니 아이들보고 뭐라 할 수도 없는 것 같다. 어른이 먼저 고쳐야지. 우리 시대의 교육은 허망한 정답을 찾아 헤매고 있는데, 이제 정답 찾기를 그만두고 우선 내 하는 질문이 올바른 것인가를 찾아야 할 판이다. 올바른 질문은 진짜 정답에 거의 다가선 셈이다. 우리의 질문은 먼저 권위와 권력의 틀에 대한 것이다. 하향평준화, 국가 경쟁력, 영재 교육, 영어 출세론 등이 풍미하는 가짜 언어의 홍수 속에서 우리 아이들은 어른들의 권위와 욕심에 짓밟히고 있다.

나는 담배를 즐겨 피는데 요즘 집안 식구들의 금연 압박으로 인해 참으로 곤란에 빠져 있다. 그런데 둘째 놈이 하도 컴퓨터 게임에 빠져 있어서 끝내는 내가 화를 내기 시작했다. “너 계속 게임만 하고 있을꺼냐?” (실제로는 더 험악한 상황이었음) 나의 호령에 그 놈이 대답을 하는데, 그 답변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아빠가 담배를 끊으면 저도 게임을 끊을 께요.” 권위와 기득권이 주춤하는 그런 번뜩임이었다. 그래서 아버지의 상징을 먼저 떠올려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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