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희망을 심으며
이기고 지는 싸움의 끝에는 반드시 승자와 패자가 있다.
핵폐기장을 추진할 수단으로 진행한 주민투표를 통해 경주가 그 최종 부지로 결정이 나면서 정부와 경주시장을 비롯한 유치측은 승자가 되어 축배를 들며 축포를 터트리고 있다.
방폐장 주민투표 경쟁지역으로 4개 지역이 신청한 8.31 이후 11.2 주민투표 결과가 나오기까지 2달여 기간 동안 금권, 관권선거와 부정투표 사례가 속출하고 심지어 지역감정이 막판 표심을 몰아가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20여년 실패를 거듭한 방폐장 추진 국책사업이 첫 단추를 채웠다.
가뜩이나 어려운 지역살림에 지역낙후를 건드리고 잠재워졌던 지역감정에 불을 지피니 판도라의 상자가 열려진 셈이다.
주민투표법상 공무원의 투표운동이 금지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 행정력이 동원되어 유치운동이 진행된 것이 사실이고 중앙선관위나 산업자원부장관이 부정투표와 공무원 동원을 엄단하겠다고 해 보아야 국책사업 추진 당사자인 중앙정부의 지원과 엄호를 받는 지차제로서야 그것이 지역감정이든 불법이든 모든 사활을 걸어 유치를 하면 그 뒷감당은 중앙정부의 몫이었다. 경주시장이 군산에서 도는 지역감정을 들어 삭발과 단식을 하며 양북면 등 부지지역에 호소하며 반대여론을 찬성으로 돌리는 것이야말로 공무원 개입의 극치였건만 그 어떤 제재없이 이루어졌다.
중앙정부가 주민의 의견을 듣는 절차가 아니라 국책사업을 강행할 수단으로 정부권력과 예산, 지방정부 행정력까지 총동원하는 현행 주민투표는 주민의 의사를 객관성 있게 들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공명정대하지 못한 시스템이요 또 다른 파시즘이다.
높은 찬성율로 그동안의 부당한 절차와 갈등이 압도되어 있지만 진실마저 숨길 수는 없다. 이번 방폐장 주민투표가 남긴 부정투표 사례는 주민투표법이 준용하고 있는 공직선거법의 경우 당선무효의 사유가 되고도 남는다.
국책사업이라는 이유로 옳고 그름을 가려내지 않는다면, 분명한 불법, 부정행위를 덮어두고 간다면 주민수용성을 내세운 정부시책이나 개발사업이 똑같은 방식으로 내리 먹힐 것이다.
경주시장을 비롯한 자치단체장과 공무원들의 불법 행위와 부정사례를 철저하게 조사하고 수사하여 마땅히 처벌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동안 지역과 전국에서 반핵운동을 해온 환경단체나 지역단체는 경주에서 방폐장을 받아들인 89.5%의 민심을 부정투표의 결과로만 돌리기 어려운 현실에 직면하게 되었다.
첫째는 다수가 찬성표를 던진 지역민심을 어떻게 읽고 그 민심을 추스를 것인가이다. 분명 정부가 지나치게 부풀린 거품과 경제효과에 대한 기대심리가 크게 작용한 결과로서 지역경제가 무너지고 있다는 징후이기도 하다.
지역경제 자립의 가장 중요한 바탕이었던 농촌과 농민이 붕괴하는 한편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늘어 도시서민층의 생계기반이 흔들리는 현실을 극복할 단기처방으로 방폐장에라도 투기를 한 셈이다.
천년고도 경주시도 역사문화도시라는 개성과 특성을 통한 지속가능한 발전모델을 내놓지 못하고 방폐장을 선택하였다.
정부가 내놓은 경제효과의 거품이 걷히면 다시 차분하게 핵폐기물로부터 지역의 미래와 역사유산을 안전하게 지킬 것인가를 숙의해야 할 것이다.
둘째는 앞으로 핵폐기물을 포함한 핵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나갈 것인가이다.
핵폐기장 반대투쟁이 장기화하면서 누적된 피로감과 갈등은 어딘가에 처분장을 지어야 한다는 정부의 논리가 국민들에게 설득력을 갖도록 하였다.
일견 경주에 중저준위 방폐장이 만들어지면 핵폐기물 문제가 해결되는 것인 양 착각하도록 만들었다. 사실 지난 20년간 실패를 거듭한 핵폐기물 갈등의 진짜 핵심은 그대로 남아 있다.
핵폐기물의 99% 처리는 사용후 핵연료인 고준위핵폐기물이다. 그러나 민주주의 양심마저 저버리면서 주민들에게 이기고 지는 싸움으로 강요한 이번 중저준위 방폐장 유치는 결국 올바른 해법과 절차를 거치지 않으면서 가장 중요한 문제를 그대로 남겨놓았다.
정부 주장대로라면 고준위 핵폐기물이 포화되는 시점도 코앞에 닥쳐 있다. 사용후핵연료 처리 방안이 정해져 있지 않으니 사용후핵연료를 재처리할 의혹마저 사고 있는 것 아닌가?
그동안 환경단체는 방폐장을 서두를 것이 아니라 사용후핵연료를 포함한 핵폐기물 처리에 관한 사회합의과정에 들어갈 것을 요구하였다.
수백년에서 수십년까지 안전하게 격리하여 관리해야 하는 핵폐기물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핵폐기물 관리법과 같은 기본 시스템 하에서 충분한 토론과 대화, 타당성조사와 기술검증 등을 거쳐서 합의방안을 이끌어내는 것이 지금까지 전 세계가 경험하고 있는 가장 최상의 해법이 되고 있다.
이것이 반핵운동이 끝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인 이유이다.
20여년 긴 반핵운동을 성찰하고 새로운 희망을 심어야 하는 사명감을 추스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