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말>
1993년 일본 도쿄에서 처음 시작된 반핵아시아포럼(NNAF, No Nukes Asia Forum)은 올해로 32년을 맞이했다. 지난 30년 동안 포럼은 핵산업과 각국 정부의 핵 진흥 정책에 맞서 ‘핵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아시아 시민사회의 소중한 연결고리 역할을 해왔다.
제22회 반핵아시아포럼은 5월 15일부터 21일까지 7일간 대만에서 열린다. 이번 포럼에 모인 아시아 반핵 활동가들은 역사적인 순간을 함께한다. 5월 17일, 마안산 핵발전소의 가동이 중단되며 대만은 공식적으로 ‘운영 중인 원전이 없는 나라’가 된다. 이는 수십 년간 독재 정권에 맞서 온 대만 탈핵운동의 결실이자, 오랜 시간 연대해온 아시아 활동가들 모두가 기뻐할 성과다.녹색연합은 반핵아시아포럼 현장에서 각국 활동가들의 목소리를 듣고, 이를 기획 연재로 소개한다.

▲ 대만 반핵아시아포럼(NNAF) 현장에서 만난 청년 활동가 리 조쯔(李若慈). 그녀의 활동명은 ‘에타(Etta)’이다
2025년 5월 17일, 대만의 마지막 원자력발전소인 마안산 2호기의 가동이 멈추기 하루 전, 우리는 24세의 청년 활동가 리 조쯔(李若慈)를 만났다. 사람들은 그녀를 ‘에타(Etta)’라고 부른다. 핵발전을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은 조금 남다르다. 현재 타이베이에 위치한 국립대만대학교에서 인류학 석사 과정을 밟고 있는 그녀의 관심은 ‘대규모 인프라가 지역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 있다.
“핵발전은 단순히 과학이나 기술의 문제가 아니에요.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삶과 깊게 맞닿아 있는, 사회적인 문제이기도 하죠.”
에타는 연구실 책상 앞에만 앉아 탈핵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아니다. 거리로 나가고, 마을을 찾아가며 몸으로 부딪힌 경험이 있었기에 지금의 연구가 가능했다. 과학보다 사람을, 논문보다 현장을 먼저 생각하는 그녀의 이야기는 그래서 더욱 특별하다.
“숫자보다, 기술보다, 사람의 말이 먼저 들려야 해요”
2018년, 에타가 18살이던 해. 대만에서는 제4원전 재가동 여부를 두고 국민투표가 치러졌다. 정당은 찬반을 명확히 갈랐고, 언론은 경제성과 기술 논쟁으로 떠들썩했다. 하지만 에타는 어딘가 부족한 점을 느꼈다.
“당시 대중의 논의는 대부분 과학기술 중심이었어요. 그런데 정작 중요한 지역 주민들의 관점은 거의 들리지 않았죠.”
에타는 친구들과 함께 ‘Their Nuke Story’라는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학생들로 구성된 이 소모임은 대만에 소재한 네 개의 원전 지역을 직접 방문해, 그곳 주민들과 대화를 나누고 인터뷰를 기록했다.
“그들의 반핵 이야기를 들으며, 국민투표 과정에서 빠져 있던 지역의 목소리를 보완하고 싶었어요.”
“기억에 남는 인터뷰가 있어요. 스먼(石門)과 마오린(茂林) 지역에 사는 한 주민을 만났는데, 그는 자신이 줄곧 그곳에 살아왔다고 했어요. 그런데 대학에 진학해 외지 친구들에게 사는 곳을 말했을 때, 그들은 ‘그 동네는 오염된 곳 아니야?’, ‘네가 준 과일은 먹어도 돼?’, ‘그 물 마셔도 괜찮아?’라고 물었다고 해요.”
“방사능 누출 기준에 문제가 없다 해도, 외지 사람들은 왜 그곳을 오염된 지역이라고 오해할까요? 아무리 과학적으로 안전하다고 해도, 결국은 정부나 전력회사가 제시하는 기준 자체를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의심 아닐까요?”
에타는 이렇게 말한다. 핵발전은 단순한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고. 핵발전소 인근에 살아가는 주민들, 그리고 그 주변을 둘러싼 수많은 사회적 역동까지 함께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특히, 주민들과의 소통, 위험에 대한 공감, 그리고 감정의 언어로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없다면, 이 논쟁은 결코 풀리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녀는 ‘Their Nuke Story’ 프로젝트와 자신의 연구를 통해, 과학적 지식과 지역 주민들의 감각 사이에 존재하는 ‘지식의 간극’을 메우고자 했다.

▲반핵아시아포럼에서 활동 사례를 발표 중인 에타(Etta) 활동가. 5월 17일 가동이 중단된 대만 마안산 핵발전소 인근 지역 주민들의 이야기와 분석을 담은 프로젝트 ‘Their Nuke Story’를 소개하고 있다.
“탈핵은 했지만, 대화는 없었어요”
대만의 탈핵운동은 정치와 깊이 얽혀 있다. 에타는 이 점이 장점이자 동시에 한계라고 말한다.
“장점은 분명해요. ‘핵 없는 고향(非核家園)’이라는 정책을 실현하는 데 정치의 힘이 도움이 됐어요. 하지만 단점은, 정당 정치가 이 문제를 단지 정치적 입장에 묶어두면서, 보다 넓은 공적 토론의 공간을 좁혔습니다.”
대만에서 치러진 두 차례의 국민투표는 사실상 정당 지지 여부에 따라 찬반이 갈렸다. 국민당을 지지하면 찬성, 민주진보당을 지지하면 반대. 이렇게 단순화된 구도 속에서 핵발전에 대한 진지한 공론은 설 자리를 잃었다는 것이 그녀의 주장이다.
“정말 중요한 건 ‘탈핵을 했느냐’가 아니라, 그 과정에서 우리 사회가 어떤 대화를 나눴는가예요.”
에타는 그런 ‘대화의 부재’를 더욱 절실히 체감했던 순간으로, 한국에서의 한 경험을 떠올린다. 2023년 서울에서 열린 기후정의행진에 참가했을 때였다. 거리에는 ‘밀양의 눈물’이라는 문구가 적힌 피켓이 등장했고, 사람들은 10년 전 송전탑 건설에 맞서 싸운 주민들의 기억을 지금도 잊지 않고 있었다.
“그건 단순한 기후행진이 아니었어요. 기후위기라는 현재를 말하면서도, 그 속에 고통의 과거를 함께 품고 있었죠. 시민들이 과거의 이야기를 현재의 목소리로 이어가고 있다는 점이 정말 인상 깊었어요.”
“탄소감축의 이름으로, 핵이 다시 포장되고 있어요”
에타는 오늘날 반핵운동이 과거보다 더 어려운 시대를 마주하고 있다고 말한다. 가장 큰 이유는, 핵발전이 ‘기후위기의 해법’처럼 포장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핵발전을 ‘탄소 배출 없는 청정 에너지’라고 홍보해요. 마치 우리가 걱정해야 할 건 CO₂뿐인 것처럼 말이죠. 하지만 핵폐기물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고, 다음 세대에 떠넘겨지고 있어요. 이건 세대 간 정의를 배신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녀는 지금 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언어와 메시지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기술에만 반대하는 운동이라는 낙인을 넘어서기 위해, 핵발전이 사람들의 일상에 어떻게 영향을 주는지를 이야기해야 한다고 믿는다.
“지금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져야 해요. ‘이런 상황에서 반핵운동을 어떻게 지속할 수 있을까?’, ‘녹색으로 위장된 핵발전 속에서 우리는 어떤 메시지를 낼 수 있을까?’”
변화를 만드는 힘
올해 대만에서 열리는 반핵아시아포럼(NNAF)은 에타에게 첫 공식 참가이기도 하다. 작년 아시아 청년교류회를 통해 각국의 청년들과 깊은 인상을 주고받은 그는, 다시 그들과 마주하고, 새로운 고민을 함께 나누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한국의 시민들에게, 지금의 한국 청년들에게 전한 말은 이렇다.
“대만은 비핵 국가로 나아가고 있지만, 일본이나 한국처럼 여전히 탈핵운동이 쉽지 않은 곳들도 많아요. 그래도 저는 재작년 9월, 한국에서 열린 기후정의행진에 참가하며 큰 희망을 느꼈습니다. 거리에는 수많은 청년들이 나와 활기차게 목소리를 내고 있었어요. 그 모습이 정말 인상 깊었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그런 시민사회의 생동감이라고 생각해요. 끊임없이 이어지는 움직임, 그 힘이 결국 변화를 만들어낼 거예요.”
*위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게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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