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름, 존재를 부르는 방식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다. 이름 짓기는 기념비적 선언이고 관계와 기억의 중추로 작동한다. 인간은 누군가에게 이름을 줌으로써 존재를 불러들이지만, 동시에 그 이름으로 대상을 규정하고 소유하려 한다. 다큐멘터리 〈나의 문어 선생님〉을 본 사람이라면, 감독이 바다 속 친구인 문어에게 끝내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할 것이다. 그는 문어를 이해하려고 애썼지만, 인간의 언어로 규정하지 않기로 했다. 언어는 곧 경계이자 지배의 수단이기도 하니까. 문어는 그저 바다의 리듬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로 남았다. 이름을 부르지 않는 선택은, 언어로 존재를 포획하지 않겠다는 다짐이었다.
제인구달은 반면, 연구하던 침팬지들에게 번호 대신 이름을 붙였다. 플로, 데이비드 그레이비어드…. 각 개체는 고유한 성격과 관계를 지닌 존재로 기록되었다. 과학계에서는 연구 대상에게 인간적 성격을 부여하는 것을 금기시했지만, 구달은 그 규범에 맞섰다. 관습적인 번호 대신 ‘이름’을 붙여 각각을 독립적 개체, 개성 있는 인격체로 인정했고, 개별성과 존엄성을 드러냈다. 이름은 객관성의 붕괴가 아니라, 존재의 복권이었다.
나에게는 열렬히 이름 지어 부르고 싶은 존재들이 있다. 웅담 채취와 소비를 위해 철창 속에 갇혀 평생을 살아온 곰들이다. 아이러니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곰을, 야생동물을 보호해야 하는 환경단체 활동가가, 보호 대상을 감성적으로 타자화하다니. 하지만 내가, 우리가 명명하고자 하는 이름은 소유를 위한 이름이 아니다. 잊혀진 존재를 다시 불러내기 위한 이름, 존재의 복원을 위한 이름이다. 수백 마리의 곰들이 ‘사육곰’이라는 단어 속에 묶인 채 철창 안에서 나고 죽었다. 인간의 보신을 위해 사육되던 그들은 제도와 산업의 언어 안에서 ‘곰’이라는 일반명사로만 존재했다. 그 ‘이름 없음’이 그들의 고통을 익명으로 덮어버렸다. 이제 곰들에게 이름을 붙임으로써 존재의 시간을 되찾고, 구호의 대상이 아닌 관계의 주체로 곰을 다시 마주할 때이다.
오삼이를 부르던 사람들은 이제 어떤 곰의 이름을 기다릴까
인간은 어떤 곰은 먹고, 어떤 곰은 보호하면서 같은 종에게 서로 다른 이름을 부여해왔다. 웅담용 사육곰, 동물원의 전시곰, 지리산의 복원곰 — 모두 인간이 정한 이름 아래 살아간다. 같은 ‘곰’이지만, 누군가는 자원으로, 누군가는 전시물로, 또 누군가는 보전의 상징으로 존재했다. 인간은 이름을 통해 생명의 가치를 구분하고, 곰의 삶에 다른 운명을 부여했다.
지리산 복원곰 ‘KM-53’은 ‘오삼’이라 불렸다. 숫자로 표식되던 존재가 이름을 얻은 것이다. ‘종 복원’의 성공 사례였던 KM-53은, 오삼이가 되었을 때 비로소 사람들의 이야기 안으로 들어왔다. “오삼이는 잘 지내고 있을까?”, “오삼이는 왜 또 지리산을 벗어났을까?” 지리산이라는 행정 권역을 자꾸만 벗어나 ‘모험왕’, ‘방랑곰’이라 불리던 오삼은 결국 반복된 포획과 익사로 생을 마쳤고, 사람들은 곰의 삶과 죽음을 말하기 시작했다. ‘오삼’은 우리 사회가 야생을 여전히 ‘통제 가능한 생명’으로 보는 현실을 드러낸 상징이 된 것이다. ‘곰’이라는 종은 데이터를 남기지만, ‘오삼’이라는 이름은 이야기를 남겼다.

사육곰에서 ‘누군가’로
이름도, 이야기도 없는 곰들이 철창 안에 아직 많다. 단순히 ‘호칭’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아니다. 야생의 동물에게 인간의 언어를 억지로 붙이자는 뜻도 아니다. 인간의 잘못된 정책과 욕망으로 평생을 철창 안에서 살아야 했던 곰들의 현실에 시선을 두자는 것이다. 그들을 이제는 ‘누군가’로 불러내자는 것이다.
녹색연합은 20년 넘게 사육곰 문제 해결을 위해 활동하며, 그들의 현실을 바꿔왔다. 사육곰 농가의 실태를 조사하고, 증식 금지 조치를 이끌어냈으며, 곰들의 개체 정보를 담은 DNA 데이터베이스를 구축•관리하게 했다. 곰이 더 이상 집단 단위의 자원이 아니라, 하나의 생명으로 존중받을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을 만든 것이다. 시민 모금으로 ‘반이’, ‘달이’, ‘곰이’, ‘들이’(이들의 이름은 시민 공모로 지어졌다)를 비롯해 열 명의 곰을 추가 구출했고, ‘곰 이삿짐 센터*’라는 캠페인을 통해 철창 밖으로의 여정을 이어가고 있다.
이제 한국에서 곰은 더 이상 웅담을 위해 길러지지 않는다. 그들은 나와 같은 ‘생명’으로 존재할 뿐이다. 그러므로 사육곰 종식은 ‘정책의 완성’이 아니라 ‘윤리의 출발’이어야 한다. 우리는 이 존재들을 기억함으로써만 다시는 같은 착취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다. 철창 밖으로 나오는 곰 한 명, 한 명의 이름이 인간과 자연을 다시 연결하는 서사의 첫 문장이 되기를 바란다. 산업의 끝이 아니라, 존재의 이름을 되찾는 이야기로의 사육곰 종식이 이루어지길, 곰들의 이름 하나하나가 우리가 생명을 대하는 태도의 깊이를 증명할 날이 오기를 바란다.
*아직 이름이 필요한 곰들 240여 명이 구출을 기다립니다. 구출을 위한 후원금도, 보호시설도 부족한 현실에 당신의 관심이 필요합니다. wecangreen.org/bear2482 곰 이사빨리! 지금 접속해 주세요.
배선영 (녹색연합 활동가)
*이 글은 빅이슈에 기고되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