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사라지는 것들을 위한 다정한 약속, 보호지역

2026.04.02 | 백두대간, 생태계보전, 환경일반

안녕 고라니

어떻게 하면 ‘자연이 있는 그대로 존재할 권리’를 우리 법에 오롯이 담아낼 수 있을까 고민했습니다. 여러가지 방법을 생각했습니다. 우리 헌법이 인간만을 위한 헌법이 아니라 모든 생명의 권리를 담아내는 헌법이 될 수 없을까? 뉴질랜드 왕가누이강처럼 우리 숲과 강에도, 야생동식물에게도 생태법인의 지위를 줄 수는 없을까? 하지만 제도의 큰 변화는 사회적 합의와 고민의 시간이 켜켜이 쌓여야 가능한 일입니다. 그 시간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현장의 활동가인 저는 삶터에서 내몰리는 생명들을 마주하고 있었고요. 큰 목표는 목표대로 두고 한 걸음씩 나아가는 동시에, 지금 당장 생명들을 지키기 위해 행동해야 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가진 제도 안에서 ‘자연은 온전히 보호받아야 함’을, 그리고 ‘인간은 그들을 보호해야 함’을 약속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습니다. 우선 할 수 있는 일은 ‘보호받아야 한다’고 명시된 땅과 바다를 조금씩 더 넓혀가는 일이었습니다. 바로 보호지역 지정입니다. 물론 보호지역이 된다고 해서 모든 위협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다섯 개의 보호지역이 겹쳐진 설악산조차 관광용 케이블카라는 위협 앞에 서 있는 것이 현실이니까요. 하지만 꼭 지켜야 할 소중한 공간임을 명시하고, 해서는 안 될 행동을 법으로 약속하는 일은 생명들을 위한 안전장치로서 꼭 필요합니다.

안녕 홀쭉한 오소리

보호지역은 국가가 지정합니다. 시민인 우리는 국가에 보호지역 지정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보호지역은 야생동식물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름 모를 생명들이 일궈놓은 생태계의 결실을 매일 나누어 쓰고 있거든요. 깨끗한 물과 상쾌한 공기는 우리가 모르는 곳에서 야생동식물들이 묵묵히 제 삶을 살아내고 있기에 존재합니다. 그들의 삶터가 좁아질수록 우리를 지켜주는 이 소중한 연결망도 점점 얇아집니다. 결국 보호지역을 넓히는 일은 야생동물의 보금자리를 만드는 동시에 기후생태위기로부터 우리의 일상을 지켜낼 안전망을 만드는 일입니다. 그들이 마음 놓고 숨 쉴 수 있어야 우리의 내일도 비로소 안녕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질문이 생깁니다. 정말 시민의 힘으로 보호지역을 넓힐 수 있을까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우리의 지난 발자취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대한민국의 시민은 이미 여러 차례 정부의 보호지역 지정을 이끌어낸 적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보호지역도, 사유지를 자발적으로 보호지역으로 지정한 첫 사례도 시민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백두대간

백두대간 보호지역

사람의 지도 위에는 행정 편의에 따라 수많은 선이 그어지고 이름이 붙지만 자연은 본래 하나로 이어져있습니다. 중요한 서식지를 이어주며 생태계의 연결성을 지켜주는 곳을 생태축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나라에는 세 개의 핵심 생태축이 있습니다. DMZ, 백두대간, 연안해양입니다. 그중에서도 백두대간은 우리 땅을 호랑이로 비유할 때 굳건한 등허리에 해당합니다. 백두대간을 지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낯설던 시절, 녹색연합 활동가들은 백두대간을 발로 걸었습니다. 백두대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난개발 현장과 야생동물을 죽음으로 내모는 밀렵구를 발견했습니다. 활동가들은 끊어지고 훼손된 산줄기의 실상을 세상에 알렸고 마침내 2003년, 백두대간 보호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보호지역이 탄생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정도 규모의 산악지형을 연속으로 보호지역으로 지정한 사례는 국제적으로도 드문 일이었습니다.

희양산 산림유전자원보호구역

사유지를 보호지역으로 지정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누군가에게 땅은 재산이고 권리이기에, 사유지를 보호구역으로 묶는 일은 재산권 침해에 대한 우려와 충돌하곤 합니다. 그래서 보통 사유지 주인은 보호지역 지정을 꺼립니다. 하지만 고요해야 할 사찰 주변에 광산과 레저단지 개발 계획이 쏟아지자 봉암사는 수행 환경과 자연을 지키기 위해 보호지역 지정이라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녹색연합은 봉암사, 조계종과 협력하여 희양산 일대를 보금자리 삼은 야생동식물을 조사하고 그 생태적 가치를 알렸습니다. 이를 토대로 2002년, 약 660ha의 사찰 소유지가 산림유전자원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습니다. 국내 최초로 사유지 소유자가 먼저 정부에 보호구역 지정을 건의해 성사시킨 기념비적인 사례입니다.

안녕 담비

왕피천 생태경관보전지역

경북 울진과 영양의 깊은 골짜기를 굽이쳐 흐르는 왕피천은 우리나라 하천의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곳입니다. 산양과 담비, 수달 등 19종의 멸종위기 야생생물이 이곳에 뿌리를 내리고, 때가 되면 연어가 먼 바다를 돌아 다시 고향으로 거슬러 오릅니다. 하지만 2000년대 초반, 도로 개설과 관광 단지 개발 계획이 잇따르면서 억겁의 세월이 빚어놓은 생태계가 파괴될 위기에 처했습니다. 녹색연합은 울진군과 함께 이곳의 생태적 가치에 대해 조사하여 알렸고 그 결과, 2005년 환경부는 울진군 서면과 근남면, 영양군 수비면 일대를 왕피천 생태경관보전지역으로 지정했습니다. 국내 생태경관보전지역 중 가장 큰 면적입니다. 또한 마을을 가장 잘 아는 주민들이 환경감시원이 되어 보호의 주체가 되는 모델도 만들었습니다.

민북 산림유전자원보호구역

DMZ 남쪽, 민간인통제선 지역은 지난 70년간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그곳의 숲이 울창하고 물길이 맑았던 건 군사적 통제 때문이었습니다. 군사 규제가 풀리면 언제든 난개발될 위험이 컸습니다. 녹색연합은 이 공간의 평화가 정세의 변화나 개발 논리에 흔들리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그곳에 뿌리 내린 나무와 그 품에 사는 생명들이 군사적 이유가 아닌 생태적 가치로 존중받기를 바랐습니다. 녹색연합은 산림청에 보호지역 지정을 요청했고, 산림청은 2006년부터 2018년까지 민통선 이북 국유림 약 7만ha를 산림유전자원보호구역으로 지정했습니다. 남북 관계의 부침이나 거센 개발의 물결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보호받을 수 있는 법적인 보호막을 갖게 된 것입니다.

올해도 자연생태팀 활동가들은 등산화 끈을 바짝 묶고 보호지역 지정을 위한 현장조사를 하고 있습니다. 어떤 야생동물이 살고 있는지 증명하기 위해 무인카메라 모니터링과 야생동물 서식 흔적조사를 합니다. 따뜻한 봄이 되면 나무와 풀, 꽃 조사도 할 수 있습니다. 모니터링은 경이로움의 연속입니다. 담비와 삵, 오소리 등 여러 야생동물이 오가며 서로의 생사를 확인하는 커다란 돌을 만났습니다. 깊이 쌓인 눈을 헤치고 나아가다 멈춰서는 멧돼지의 걸음이, 마치 눈오는 날의 제 발걸음과 비슷해보여 웃기도 했습니다. 살아내느라 고되지만 있는 그대로 평화로울 이들의 삶이 지난 수천년 간 이어져온 대로, 앞으로도 특별할 것 없이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백두대간

보호지역을 넓혀가는 여정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백두대간에서 왕피천까지, 우리는 지도 위 보호지역을 점점 넓혀왔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현장을 누비며 야생동물의 안부를 묻고, 그들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애쓰는 활동가들의 발걸음에 힘을 보태주세요. 네이버 해피빈에 모금함을 열어두었습니다. 여러분의 후원은 사라져가는 생명들에게 다시는 쫓겨나지 않아도 된다는 다정한 약속이 됩니다. 생명들의 보금자리를 지키는 단단한 테두리, 보호지역을 넓히는 여정에 함께해 주시길 요청드립니다.

작성자: 녹색연합 자연생태팀 이다솜 팀장

*이 글은 빅이슈에도 기고되었습니다.

녹색연합의 활동에 당신의 후원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