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생태철학2강 : 적극적인 작은 변화들이 모인다면.. – ‘비릴리오의 전쟁기계와 자동차문명’

2013.11.20 | 행사/교육/공지

 

철학 속의 생태 읽기, 그 두번째 시간은 <비릴리오의 전쟁기계와 자동차문명>이라는 제목으로 ‘자동차’로 상징되는 속도사회에 대한 철학적 진단과 고찰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동그랗게 둘러 앉아 서로를 마주 볼 수 있게 하였는데요. 화기애애, 오손도손이라고 하기엔 조금은 어색한 기운이 감돌았지만 보다 자유롭게 서로의 이야기와 생각이 오고갈 수 있어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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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도에 관한 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서, 강사님께선 ‘시간’으로 운을 떼셨는데요. 관련 영상과 함께 숫자, 시계로 측정되고 잘게 분할되는 표준화된 시간에 대해 고찰해 보았습니다. 근대화 과정에서 효율성과 빠른 속도의 추구는 모든 사람들, 모든 고유 지역의 시간을 동일하게 표준화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계산 가능한 시간의 설정은 근대국가의 대대적 통합과 높은 생산성을 가능케 하는 시스템을 구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지만, 본질적으로 삶이라는 것은 숫자로 측정하거나 계산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데 씁쓸함마저 느껴졌습니다.

자동차는 지역과 지역을 연결하고, 물자와 자원, 사람을 수송하는 중요한 수단입니다. 수도권을 중심으로 전국각지에 뻗어있는 대한민국의 고속도로시스템은 그 연결을 원활하게 하는 역할을 담당하지요. ‘전국 1일 생활권’이라는 슬로건은 이제 우리에게 익숙한 어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각 지방은 고속도로를 통해 통합되고 연결됨으로써 그만의 고유한 시간, 고유한 리듬, 순환, 공동체의 화음이 사라지고, 수도권 중심의 ‘중앙’과 서울의 아류로 변질된 ‘주변’지역만 남아버렸습니다. 어딜가나 재래시장과 골목시장 대신 똑같은 대형마트가 그 지역의 경제의 중심부에 놓여있고, 지방에서는 수도권으로 흘러나가는 자본을 머무르게 하기 위해 축제, 특산품, 박물관, 디즈니랜드화 등의 인위적, 허구적 장소마케팅을 구사한다는 강사님의 부연설명에 수긍이 갔어요.
또한 자동차는 속도를 사적으로 소유하며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줍니다. 그러나 ‘빨리빨리’에 취한 사람들은 왜 빨리 달려야하는지 이유도 알지 못합니다. 기계와 합치를 이루어 삶의 중요한 질문들에게서 분리되어 그저 앞으로 나아가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출처:http://cfono1.tistory.com/651

폴 비릴리오는 <속도와 정치>에서 현대의 속도사회를 ‘속도의 정치’라는 개념으로 진단합니다. 근대화과정에서 대규모의 노동자들은 광장과 거리를 자유롭게 점유하고, 점거함으로써 공간의 정치를 편성하였지만, 이내 질주하는 자동차라는 기계에게 노동자들의 공간은 빼앗기고 맙니다. 나치는 노동자들의 가두행진이나 거리 시위를 사전에 막기 위해 17만 명의 도시 중산층에게 폭스바겐을 싼 값에 사도록 유도했을 정도라고 합니다. ‘공간의 정치’는 ‘속도의 정치’에 의해 무력화되며, 파괴된 것이지요. 속도는 민중에 대한 전쟁 선포와도 같고, 속도사회는 끊임없는 전쟁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오늘날 달리는 자동차에 몸을 싣는 것은 암울한 미래로 가는 탄도미사일에 몸을 실은 것과 같다는 비유를 사용하셨어요. 미사일과 같이 속도를 내는 공간은 그 내부와 외부를 분할함으로써 공간 안에 있는 사람은 사라지는 외부를 풍경으로 인식할 뿐입니다. 이 과정에서 외부와의 유의미한 관계의 형성은 불가하며, 멈춤은 경쟁에서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질문을 던져봅니다. 멈추는 것은 과연 죽음과 같은 의미일까요? 멈추었던 경험에 관해 강사님께서 던지신 질문에 대해 어떤 수강생 한 분은 건강상의 이유로 바쁘게 돌아가던 일상을 멈추어야 할 시기가 있었는데, 처음에는 무언가를 해야만 할 것 같은 불안감이 많이 들었다는 말씀을 해주셨고요(공감이 많이 되었어요). 또 다른 한 수강생분은 자연물을 관찰하고 감상하기 위해 가던 길을 멈추었던 경험을 나누어주셨더랬죠. 오히려 질주의 멈춤, 속도의 정지는 타인, 풍경, 주변으로 분리되어 있던 존재가 새로운 관계와 의미, 생명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므로 죽음을 거스르는 형태의 하나일 지 모릅니다.

과연 우리는 이 거대한 속도와 흐름에 대해 대항할 수 있을까요? 시간의 바리케이트를 치는 것이 과연 가능한 것일까요? 강사님께서는 본인의 경험과 곳곳에서 느림과 여백으로 빠름과 질주에 저항한 사례들을 소개해주셨습니다. 회의의 결과물을 구성하거나 역할 분담에 효율성을 배재하고 실천의 자율성을 존중하며 관계와 주체성 형성을 중점에 둔 ‘초록당사람들’의 비폭력 공감 대화. 아침 출근길에 느릿한 자전거로 자동차들의 앞을 꿋꿋이 가로 막는 한 아저씨. 2007년부터 2012년까지 진행되었던 ‘성미산마을 자동차두레’의 여섯 가구의 자동차 공유. 독일 프라이부르크의 보행자, 자전거 중심의 교통 정책. 덴마크 대안 공동체 크리스티아니아 생태마을 사람들의 일화. 그리고 1990년대 말 울산의 한 공장 파업현장에서 가동을 멈춘 기계들 사이로 열린 생태학교와 공동체의 노래가락까지. 어쩌면 이 속도전쟁에 대한 종전선언은 더 무시무시한 무기를 장착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생명의 속도를 회복하는 작은 변화들로 이루어지는 것인가 봅니다.

마지막으로 강의를 들으며 떠올랐던, 개인적으로 참 좋아하는 노래의 가사 일부분을 끄적여보며 ‘철학 속의 생태 읽기 제 2강’ 후기를 마칩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은
10분이 늦어 이별도 하지
시계도 숫자도 다 있는 이곳에서
우리는 만나 사랑을 하지
(좋아서 하는 밴드 , ’10분이 늦어 이별하는 세상’ 중)

글 : 장학생 김지은

자세한 내용은 신승철 선생님의 <갈라파고스로 간 철학자>를 참고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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