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환경대탐사, 700km를 걷다.
60일동안 꼬박 걷습니다.
도상거리 701km.
강원도 고성 향로봉에서 지리산 천왕봉까지.
약 6,000장의 야장을 쓰며, 백두대간 마룻금 훼손실태 조사를 합니다.
녹색연합은 12년 전 걸었던 그 길을 똑같이 걷고,
다시 한번 우리 모두의 백두대간을 마주하고, 백두대간의 아름다움과 아픔을 전하고자 합니다.
[22일차] 2015년 9월 27일 (일) 맑음
구간: 두문동재~은대봉~중함백~만항재~수리봉~화방재
거리: 12.5km
걸음수: 16,538걸음
2015년 추석 당일, 숙소에서 해가 떠오르는 모습을 바라보며 우리는 다시 백두대간 탐사를 위해 두문동재로 향했다. 오늘 가야할 두문동재~화방재 구간은 사람들이 많이 찾는 구간이고, 함백산을 오를 때를 제외하면 전체적으로 힘든 구간은 아니라서 부담은 적었다. 이틀을 쉬고 다시 걷는 백두대간, ‘첫째도 안전! 둘째도 안전! 셋째도 안전!’ 구호를 외치고 조사를 시작했다.
두문동재는 1,200m고지에 위치한 높은 고갯마루이다. 두문동재를 이전에는 싸리재라고 불렀다. 싸리재는 주변의 옛 이름이 그대로 옮겨온 것이고, 두문동재라는 명칭은 고려 도읍 개성 송악산의 두문동에 은거하던 고려 충신들이 흩어지면서 일부가 정선 땅으로 들어갔는데, 그들과 관련되어 생겨난 이름으로 보고 있다.
정선과 태백지역에서 광산이 한창이던 무렵의 두문동재는 아주 부산한 길이었다고 한다. 1980년대 초 공식적으로 집계된 태백지역의 광부만 해도 2만 명이나 되었고, 그들이 전국 석탄 생산량의 30%를 캐냈다고 한다. 하지만 그 후 하나둘씩 탄광이 문을 닫고 두문동재 일원은 그야말로 황무지로 변했다. 게다가 인근에 카지노가 들어서면서 지금은 전당포가 줄지어 들어서있다. 두문동재에는 오래 전에 터널이 뚫려 고갯길은 더욱 한가로워졌다. 두문동재의 옛 고갯길은 주로 금대봉-은대봉-함백산을 가기 위한 관광버스만이 이용하고 있다.
두문동재에서 은대봉으로 오르는 길은 사람들이 많이 찾는 구간이라 그런지 등산로는 넓은 편이었고, 평탄한 길이었다. 조금 올라가다 뒤를 돌아보니 매봉산, 금대봉, 두문동재 등이 보였다. 우리가 지나온 길들이 한 눈에 보였다. 풍력발전기가 돌아가는 매봉산, 금대봉을 거쳐 두문동재까지. 전체적으로 포근한 느낌을 주는 경관을 계속 돌아보며 즐기기에 바빴다. 한참을 넋놓고 바라보다가 “이러다 또 야간산행 하겠다”는 대장의 말을 듣고 은대봉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은대봉으로 가는 길, 어젯 밤에 싼 듯한 삵똥을 발견했다. 등산로 한 가운데 덩그러니 놓여 있는 삵똥. 야생동물 흔적을 발견하는 날은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았다.
은대봉에 도착해 잠시 숨을 고르고 중함백으로 출발했다. 숲길, 평상 등 가릴 것 없이 곳곳에 낙엽이 쌓여 있었다. 빨간 낙엽이 쌓인 아름다운 숲길에 취해 걸었다. 뒤로는 다채로운 색을 가진 숲 너머로 고한읍내가 보였고, 앞으로는 오투리조트와 함백산 정상에 있는 중계탑이 보였다.
주목군락지를 지나 함백산 정상에 도착했다. 함백산은 강원도 태백시와 정선군 고한읍의 경계에 있는 1,572m의 산으로 우리나라에서 6번째로 높은 산이다. 함백산은 조선 영조때의 실학자 여암 신경준이 작성한 산경표에 대박산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지금은 왜 함백산으로 바뀌었는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다. 태백, 대박, 함백이라는 말은 모두 ‘크게 밝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높은 함백산에 오르니 날씨가 맑아 온 사방을 다 조망할 수 있었다. 함백산 정상 크게 자리 잡고 있는 중계탑과 오투리조트, 저 멀리에는 태백선수촌과 도로 등이 보였다. 그리고 우리가 걸어온 백두대간이 보였고, 앞으로 가야할 백두대간이 보였다.
함백산에서 탐방로를 따라 내려오자 도로를 만났다. 길가에 많은 차들이 주차되어 있었다. 오투리조트, 태백선수촌 도로를 이용하면 이 곳까지 차량으로 올라올 수 있다. 그 덕분에 함백산을 쉽게 오를 수 있다. 게다가 함백산을 오르는 등산로는 정비가 잘 되어 있는 편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적은 부담을 안고 쉽게 오를 수 있는 듯 하였다.
백두대간 마룻금을 따라 만항재로 향했다. 도로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마룻금이어서 그런지 종종 자동차 소리가 들려왔다. 만항재 가로지르는 414번 지방도를 만났다. 만항재는 해발1,330m로서 우리나라에서 차량을 이용해 갈 수 있는 가장 높은 고개이다. 과거 고려말 조선초기 경기도 개풍군 광덕산 서쪽기슭 두문동에 은거해 살던 사람들 일부가 정선에 옮겨와 살면서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킨 사람들이 고향에 돌아갈 날을 기다리며 이 지역의 제일 높은 곳인 만항에서 빌었다고 하여 처음에는 망향이라 불렀다가 훗날 만항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만항재는 함백산 야생화 공원을 조성해놓은 곳이라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오늘도 예외는 아니었다. 수 많은 차들이 도로 위에 주차되어 있었고, 가족 단위의 많은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숲을 즐기고 있었다.
만항재에서 조금 벗어나자 사람이 없는 듯한 작은 공군기지가 나왔다. 공군기지 철책을 돌아 한적한 숲길로 접어들었다. 뜻밖에도 많은 사람과 자동차를 보게된 후라서 한적한 숲길은 참 반가웠다. 쭉 뻗은 일본잎갈나무 군락을 걸으며 숲을 느낀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한적한 숲길을 걷다보니 어느새 수리봉을 지나 화방재에 도착했다. 우리를 마중 나온 지원팀이 기다리고 있었다. 숙소에서 지원팀이 직접 챙겨온 여러가지 추석 음식을 나눠 먹다보니 어느새 2015년 추석이 지나가고 있었다.
[23일차] 2015년 9월 28일 (월) 맑음
구간: 도래기재~옥돌봉~박달령~선달산~늦은목이
거리: 14.1km
걸음수: 18,691걸음
오늘 조사는 도래기재~늦은목이까지 가는 구간이다. 도래기재는 지난 날 1박2일 야영을 마치고 내려온 고갯마루인데, 그때는 무사히 마쳤다는 기쁨과 안도감에 취해 자세히 둘러보지 못했었다.
도래기재는 강원도 영월과 경북 봉화를 연결하는 백두대간의 고개이다. 과거 경북 동해안과 내륙을 거쳐 경기도와 서울 등지를 잇는 보부상의 길이었다. 근대사에 있어 도래기재는 많은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데, 도래기재는 일제강점기 시절 금광에서 캔 광물을 수송하기 위해 만든 터널(금정도수)과 금강소나무 대규모 벌채가 진행된 역사를 가진 곳이라고 한다.
지금은 한적한 도래기재에서 독특한 안내판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바로 ‘백두대간 보호지역’ 안내판이었다. 그동안 백두대간 대탐사를 하면서 ‘백두대간’이라는 안내판은 많았는데, 여기가 ‘백두대간 보호구역’이라는 것을 알리는 안내판은 없었다. 이 곳이 백두대간 보호구역임을 알리는 안내판을 보니 반가웠다. 백두대간은 2004년 백두대간 보호법이 제정되고, 백두대간 보호구역은 2005년에 지정되었다. 하지만 백두대간을 보호하는 법이 있는지, 여기가 보호구역인지 아닌지를 현장에서는 알 수가 없어 아쉬웠던 참이었다.
보호구역 보호의 시작은 사람들에게 여기가 보호구역이라는 것을 알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는 사람들에게는 백두대간이라는 의미는 많이 알리도록 노력했다면, 이제는 백두대간 보호구역에 대해, 그리고 보호구역에 맞는 행동들을 알리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래기재에서 올라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낙엽이 살포시 쌓인 나무데크를 오르니 경사가 심하고 등산로가 훼손된 구간이 종종 나타났다. 지친 몸을 이끌고 올라가던 중 진달래터널을 만났다. 진달래터널은 진달래나무가 등산로를 에워싸고 있는 진달래 나무숲길이었다. 가을이라 진달래꽃은 안피었어도 진달래의 느낌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진달래터널을 지나니 이내 550년 철쭉나무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철쭉나무. 그만큼 시간이 오래지나서 그런지 확실히 다른 철쭉에 비해서 큰편이었다. 한 가지 아쉬웠던 것은 안내판의 위치였다. 철쭉나무 앞에 안내판이 있는게 아니라 다른 나무 앞에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방향도 마치 다른 나무가 철쭉나무인 듯하게 세워져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헷갈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철쭉 군락지를 지나 옥돌봉 정상에 도착했다. 옥돌봉 정상에서는 시야가 나무로 막혀져 있고, 안개가 낀 상황이어서 주변을 조망하지 못했다. 다만, 현위치에서 보이는 것들을 거리수로 계산해놓은 독특한 조망 안내판을 보았다. 최대 48km 떨어진 예천까지 소개되어 있는데, 과연 여기서 48km 거리가 사람의 눈으로 보일지 의문이었다. 그래도 현재 대략적인 위치를 파악할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옥돌봉에서 약 1시간 넘게 부지런히 내려와 박달령에 도착했다. 박달령은 큰 임도, 산신각, 화장실, 쉴 수 있는 정자 등이 있었다. 박달령 정자에서 점심을 먹고 선달산으로 출발했다. 길고 험한 오르막 길을 넘어 선달산에 도착해 잠시 쉬고 오늘 목적지인 늦은목이로 출발했다. 등산로는 훼손이 심해 걸음을 조심히 걸었고, 가는 길 주변에는 곳곳에는 철쭉이 간벌되어 있었다.
소백산 국립공원이 시작되는 늦은목이에는 국립공원임을 알리는 안내판과 함께 소백산자락길, 외씨버선길 등이 함께 소개되어 있었다. 우리는 소백산자락길 혹은 외씨버선길이기도 한 용운사 방향 등산로로 내려갔다. 크고 넓은 등산로였다. 아니, 등산로라기보다는 산책로에 가까웠다. 평탄한 산책길을 여유있게 걸어내려오며 소백산 자락을 마음껏 느껴보았다.
[24일차] 2015년 9월 29일 (화) 맑음
구간: 늦은목이~갈곶산~마구령~미내치~고치령
거리: 14.1km
걸음수: 19,899걸음
어제 내려온 용운사 인근 임도부터 소백산자락길을 따라 늦은목이로 향했다. 이른 아침의 산책로 같은 소백산자락길은 신선한 공기를 내뿜고 있었다. 늦은목이를 올라가던 중 우리가 오는 소리를 듣고 놀라 우르르 도망가는 멧돼지 가족을 만났다. 멧돼지 가족이 지나가고 난 후 풀숲이 한동안 흔들리고 소리가 났다. 갑자기 나타난 우리 때문에 조용한 아침이 방해가 되었을 것을 생각하니 미안해졌다.
늦은목이에 도착해 간단히 간식을 먹고 갈곶산으로 출발했다. 경사가 심한 갈곶산을 올라가려니 지쳤다. 등산로도 훼손이 심한 상태였다. 군데군데 돌계단을 정비한 듯 보였지만 그닥 도움은 되지 않았다. 다른 국립공원들과는 다르게 위치표시기 외에 별다른 시설이 없었다.
마구령에 도착했다. 마구령은 경상도에서 충청도, 강원도를 통하는 관문으로 장사꾼들이 말을 몰고 다녔던 고개라 마구령이라 하였으며, 경사가 심해서 마치 논을 매는 것처럼 힘들다고 하여 매기재라고도 하였다고 한다. 고갯마루 이름때문일까? 마구령에는 계속 차량이 다녔다. 마른 길 위를 자동차가 지나가자 먼지가 굉장히 많이 날렸다. 마구령으로 내려가서 식사를 하지 못하고 바로 위 능선에서 점심을 먹을 수 밖에 없었다.
마구령에서 고치령 구간의 첫 언덕 길은 경사가 매우 심했다. 허벅지를 붙잡으며 겨우 언덕을 오르자 이내 능선이 나왔다. 능선 위에 오르자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고생하며 올라온 것에 대해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땀 흘리며 걸어 올라와봐야 바람의 소중함, 햇빛을 막아주는 숲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생 없이 올라왔다면 편하게 올라왔다면 능선 위에서 부는 바람에 고마운 마음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요근래 비가 계속 오지 않아 땅이 매말랐다. 걸을때마다 먼지가 풀풀 날렸고, 마른 흙때문에 길이 많이 미끄러웠다.
고치령으로 내려가는 길은 더욱 그랬다. 등산로가 마른 흙으로 덮혀 있어 앞사람이 내려갈때마다 먼지들이 날렸고, 발이 자꾸 미끄러져 넘어졌다.
허리 높이까지 등산로가 파여 있어 크게 훼손된 등산로를 힘들게 내려와 고치령에 도착했다. 고치령은 소백산 국립공원 내에 있는 백두대간의 고갯길로서 경북 영주와 충북 단양군을 잇고 있다. 소백과 태백 사이인 양백지간의 머리에 고치가 있고 이는 우리말로 ‘옛 고개’라 하는데 신라때 이 고개 아래에다 대궐터를 잡으면서 옛 고개라 부르다 차차 변하여 고치령이라 하였다고 한다. 고치령에는 독특한 구조물들이 많았다. 누에고치 모양을 한 비석과 장승이 세워져 있었다. 고치령 장승은 재밌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특히 포도대장군이라는 장승은 익살스럽고 귀엽게 표현되어 있어 인상 깊었다. 오늘 조사는 끝났다. 하늘 위 은은하게 퍼져 있는 구름을 보며, 고치령에서 내려왔다.
[25일차] 2015년 9월 30일 (수) 맑음 -> 강풍
구간: 연화봉~제1연화봉~비로봉~국망봉~늦은맥이재~마당치~고치령
거리: 19.1km
걸음수: 25,190걸음
오늘은 새벽 4시에 기상을 했다. 오늘 출발지인 연화봉까지 차량으로만 1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인데다가, 연화봉~고치령이 꽤나 긴 구간이었기 때문에 서둘러 움직였다. 국립공원관리공단에 허가를 받고 소백산 천문대까지 차량으로 올라왔다. 소백산 천문대에 내리자 바람이 강하게 불었다. 강한 바람에 구름이 소백산을 넘다가 사라지는 신기한 장면을 보았다. 강한 바람이 아침 안개와 구름을 몰아낸 덕분에 하늘이 맑아졌다. 온 사방이 말끔하게 보였다. 소백산의 아침이 주는 경관에 감탄하고 있는 사이 우리 몸은 점점 식어갔다. 추울땐 움직여야 한다. 서둘러 조사를 시작하면서 제1연화봉으로 향했다.
자연생태탐방로를 따라 제1연화봉으로 가는 길에도 바람은 계속 강하게 불었다. 모자를 날려버리는 강풍이었다. 체온이 떨어지고 손이 얼어붙었지만 소백산이 보여주는 장관은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걸었다, 섰다를 반복하면서 조사를 진행했다. 어느새 제1연화봉에 도착했다. 오는 동안 정신이 없었다. 걸어 오는 동안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건지도 모를 정도로 정신을 쏙 빼놓는 정도의 바람이었다. 바람을 막아주는 백두대간 능선 뒤에 숨어 휴식을 취했다.
시간이 지나 따뜻한 햇볕이 내리쬐기 시작했다. 바람은 여전히 많이 불었지만 햇볕 덕분에 한결 따뜻했다. 연화봉에서 비로봉 가는 나무데크 길을 따라 주목군락이 있다. 60년대 후반까지만해도 연화봉~국망봉 능선을 따라 30,000여그루가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약 200~400년된 주목 1,500여그루가 남아 있다. 높은 곳의 강풍때문일까. 주목은 휘어져 자라 있었고, 키 낮은 풀, 철쭉, 주목 외에 다른 나무는 없어 보였다.
비로봉을 조금 지나 바람이 안 부는 곳에서 점심을 먹고 국망봉으로 출발했다. 걷기에는 나쁘지 않은 숲길이었으나 등산로 곳곳이 조금씩 훼손되어 있었다. 몇개의 작은 바위들을 넘고 국망봉에 도착했다. 국망봉은 충청북도와 경상북도와의 경계를 이루는 한 봉우리이다.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왕자인 마의태자가 신라를 왕건으로부터 회복하려다 실패하자 엄동설한에 배옷 한 벌만 걸치고 망국의 한을 달래며 개골산으로 가는 길에 이 곳에 올라 멀리 옛 도읍(경주)를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렀다고 하여 국망봉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날씨가 맑아 멀리까지는 보였지만 어디가 경주쪽인지 알 수가 없었다.
국망봉에서 오늘 목적지인 고치령까지 가는 길은 대부분 완만했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조금씩 반복되기는 했지만 심하지는 않았다. 길이 쉬웠기 때문에 조사 속도가 빨라졌다. 소백산은 커다란 바위는 없어 시원한 경관을 볼 수는 없었지만 폭신한 흙길이 있어 포근한 숲을 느낄 수 있게 해주었다. 고치령에 도착해 지원팀을 만났다. 오늘 소백산을 걷는 도중 문득 태백산이 생각났다. 태백이 ‘크게 밝다’라는 뜻이니 소백은 ‘작게 밝다’라는 뜻일까? 이름과 오늘 소백산에서 맞이한 강풍과는 상관없이 태백산과 소백산은 포근한 느낌을 주는 산이라는 기억이 남을 것 같았다.
[26일차] 2015년 10월 2일 (금) 맑음 -> 강풍
구간: 연화봉~죽령~도솔봉~묘적봉~솔봉~흙목정상
거리: 22.3km
걸음수: 20,359걸음
어제 전국적으로 비가 내렸다. 그동안 가뭄때문에 숲 속이 매말라 있었는데 모처럼 단비가 내려서 참 다행이었다. 그 덕분에 우리도 어제 하루 쉬면서 단비같은 휴식을 취했다. 오늘 조사 구간은 연화봉~흙목이 구간이었다. 이른 새벽부터 소백산 천문대까지 차량으로 올라가 조사를 시작했다. 오늘도 역시 날씨는 맑았지만 바람이 심하게 불었다. 추운 몸을 이끌고 죽령까지 내려오면서 조사를 진행했다. 죽령탐방지원센터까지는 차량도 움직일 수 있을 정도의 도로였기 때문에 힘들지는 않았다.
죽령에 도착하자 큰 도로, 휴게소 등 시설물들이 많았다. 죽령은 충북 단양군과 경북 영주군 사이에 걸려 있는 해발 689m의 고개이다. 개척 연대가 158년이니 지금부터 무려 1800년 전에 개척된 옛길이다. 죽령은 개척 이후부터 줄곧 낙동강유역과 한강유역을 연결하는 요충으로 매우 중요시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안동과 남한강 물길을 연결하였기 때문에 계립령(지금의 하늘재)와 더불어 통행량이 비교적 많은 고개였고, 조선시대에는 조령, 추풍령과 더불러 한양과 경상도를 연결하는 3대 고갯길 가운데 하나였다. 죽령은 옛날 어느 노승이 고개를 넘다가 하도 힘들어 짚고 가던 대나무 지팡이를 꽂아 놓고 갔는데 이것이 살아나 죽령이라고 부른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죽령이라는 명칭의 정확한 연원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고 한다.
죽령휴게소에서 몸을 잠시 녹이고 도솔봉으로 향했다. 솔잎이 깔린 가파른 오르막 길을 걸었다. 죽령에서 도솔봉~묘적봉으로 가는 길은 바위도 많고 구간도 길어서 어렵기로 소문난 구간이다. 어려운 구간이라 그럴까? 유독 추모 비석이 많았다. 출입금지가 크게 써 있는 안내판이 있었는데, 작년 조난 사고에 대한 내용이 실려 있었다. 근처에는 조난 사고로 사망한 분을 위해 동료들이 만들어 놓은 비석이 있었다.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산은 위험한 곳이다. 한 겨울 산은 더욱 그렇다. 만만하게 보고 산에 들어왔다가는 사고를 당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백두대간 탐사가 반정도 지났다. 점심을 먹으며 매일 아침 외치는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안전’을 마음 속으로 다시 되새겼다.
도솔봉을 넘어 묘적봉으로 가는 길, 갑자기 소백산이 화를 내는 것 같았다. ‘육산’에서 ‘악산’으로 바뀌었다. 험한 바위가 계속 이어져 있었다. 도솔봉에 오르자 우리가 가야할 백두대간 능선 길이 눈에 훤하게 들어왔다. 감탄하는 것도 잠시였다. 비가 내린 후라 그런지 날씨가 많이 추웠다. 오늘 설악산에는 얼음이 얼었고, 올 가을 최저기온인 영하 1.1도를 기록했다고 한다. 추울때는 산에서 오래 쉴 수도 없다. 체온이 급격하게 떨어져 차라리 움직이는게 더 낫다. 강풍때문에 풍경을 제대로 즐길 시간도 없이 서둘러 묘적봉을 향해 갔다. 묘적봉에 도착해 숨을 고르며 묘적봉이라 써있는 비석을 바라 보았다. 비석 뒤로 도솔봉이 희미하게 보였다.
소백산국립공원의 경계인 묘적령에 도착했다. 묘적령에는 묘적봉~도솔봉 구간이 험하므로 산행에 주의하라는 안내판이 있었다. 아까의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우리는 숨을 한번 고르고 솔봉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묘적령부터는 산림청과 지자체가 관리하는 곳이었다. 단양군이 조성한 마룻금치유숲길 안내판이 있었다. 등산로 인근에 간단한 벤치 등 시설들이 놓여져 있었다. 과연 숲길이라 부를만 했다. 큰 바위지대 없이 완만한 길이 이어져 있었다. 오늘 목적지인 흙목 정상에 도착하자 어느새 해가 지고 있었고, 붉은 석양이 하늘을 흐릿하게 채워주었다.
[27일차] 2015년 10월 3일 (토) 맑음
구간: 흙목정상~싸리재~배재~시루재~투구봉~촛대봉~저수령~문복대~벌재재
거리: 13.3km
걸음수: 18,527걸음
어제 하산했던 흙목 정상 임도까지 차량으로 이동했다. 흙목 정상 임도까지는 숙소에서 1시간이 넘게 걸리는 곳이었기에 새벽 일찍부터 움직였다. 어제보다는 바람이 약해졌다.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흙목 정상에 도착했다. 오늘 조사 구간은 흙목 정상~벌재재까지이다. 소백산국립공원과 월악산국립공원 사이를 조사할 예정이다.
흙목에서 저수치로 가는 길에 백두대간 마룻금을 중심으로 왼쪽은 침엽수, 오른쪽은 활엽수로 뚜렷하게 나뉘어진 지역이 있었다. 침엽수와 활엽수가 능선을 두고 투닥거리며 다투는 모습이 상상되었다. 싸리재에는 누군가 만들어 놓은 나무그네가 있었다. 갈 길은 멀었지만 그래도 한참동안 그네 타면서 놀았다. 배재, 시루재, 투구봉, 촛대봉 등 많은 재와 봉을 거치고 나서야 저수령에 도착했다.
저수령은 경북 예천과 충북 단양을 경계로 하는 해발 850m의 고개이다. 지금의 도로를 개설하기 이전에는 험난한 산속의 오솔길로 경사가 급하며 지나다니는 길손들의 머리가 저절로 숙여진다는 뜻으로 불리워졌다고 한다. 자전거를 타고 저수령을 올라오는 사람들도 머리를 저절로 숙이며 올라오고 있었다. 저수령에는 특이하게도 자전거를 타고 올라온 사람들이 많았다. 차량이 잘 이용하지 않는 백두대간 고갯마루의 포장도로는 자전거 타는 사람들로 채워지고 있었다.저수령에는 관광안내판, 저수령 비석, 쉼터 등 많은 시설들이 있었다. 커다란 저수령. 시설물들과 주유소, 휴게소로 꽉 차 보였지만 쓸쓸해보였다. 더 이상 영업을 하지 않는 주유소와 쓸쓸히 방치된 휴게소를 뒤로하고 문복대로 향했다.
작은 바위지대로 이루어진 문복대에 도착했다. 저수령에서 문복대는 완만한 오르막길이 반복되었다. 흐르는 땀을 닦고 벌재재로 향했다. 벌재재로 가는 길에는 일본잎갈나무(낙엽송) 조림지가 있었다. 한국전쟁 이후 산림복원을 하면서 빨리 자라는 일본잎갈나무(낙엽송)와 리기다소나무를 주로 심었다. 약 50년이 지난 지금 낙엽송과 리기다소나무 조림지역은 백두대간 곳곳에 군락을 이루어 남아 있다. 산림복원에 대해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어느새 벌재재에 도착했다. 다행히도 해가 지기 전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벌재재에서 기다리고 있던 지원차량을 타고 숙소로 내려갔다. 내일부터는 백두대간의 4번째 국립공원, 월악산 국립공원의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