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산양 집 빼앗고 15분 만에 설악산 정상정복 하고 싶어?

2024.01.16 | 설악산

‘산양 똥’에게 배우다


산양 똥을 본 적 있나요? 누군가의 똥을 보고 반갑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녹색연합 활동가들은 자주 그러한 경험을 합니다. 심지어 똥을 찾아다니고, 정기적으로 보러 가기도 합니다. 누구의 똥이냐 하면, 바로 멸종위기종이자 천연기념물인 산양의 똥입니다. 검은 타원형, 동글동글한 게 꼭 커피콩 같기도 한 생김새가 제법 귀엽습니다. 산양은 마음에 드는 자리에 배설하는데, 알알이 똥이 무더기로 쌓인 똥자리가 큰 것은 1m가 넘기도 합니다. 산양이라는 동물도 낯선 데 산양의 배설물은 당연히 처음 보았던 신입 활동가 시절부터 6년이 지난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산양 똥을 보았는데도 여전히 신기합니다. 예민하고 조심스러운 산양과 직접 만나기는 어렵지만 이렇게 흔적으로나마 그들의 삶을 엿볼 수 있다는 것이 반갑습니다.
활동가가 되기 전 저에게 산은 힘들어서 가기 싫은 곳, 그럼에도 멋들어진 경치를 보러 아주 가끔 가는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산양의 똥을 통해 산은 야생동물의 집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배웠습니다. 나를 중심으로 존재해 온 산이 누구의 것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주로 일 때문에 산에 올라 육체를 넘어 마음마저 힘들 때가 많지만, 예전엔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게 된 지금 저는 자연과 더 가까운 사이가 되었습니다. 산양이 지나간 자리를 내가 걷고 있다는 연결감이 때때로 벅차기도 합니다. 이 똥자리 주변 어딘가에 몸을 잘 숨기고 있을 산양들에게 ‘잘 살아! 네가 잘 살 수 있게 나도 열심히 활동할게!’ 속으로 인사를 보냅니다.

하지만 그 인사와 다짐이 무색하게도 산양의 터전은 위협에 시달립니다. 백두대간을 따라 전국에 분포했던 산양은 밀렵과 남획, 개발로 인한 서식지 훼손으로 멸종의 위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그나마 남아있는 안정적인 서식지도 빼앗겠다고요? 맞습니다. 설악산 케이블카 이야기입니다. 우리나라 산양의 약 18%가 서식하는 설악산, 그중에서도 케이블카가 들어설 오색구간은 핵심 서식지입니다. 사업자 양양군은 케이블카 설치 예정지가 산양의 주요 서식지가 아니라 단순한 이동 통로라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당연히 사실이 아닙니다. 케이블카 설치를 위해 공사를 벌이고, 거대한 콘크리트 지주가 꽂힐 자리는 산양이 먹고, 자고, 쉬고, 새끼를 낳고 기르는 곳입니다. 오색 케이블카를 타면 15분 만에 정상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그 15분을 위해 우리는 산양의 집을 파괴하고, 삶을 빼앗는 것입니다. 케이블카 예정지에서는 산양의 흔적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담비와 삵의 똥도 만날 수 있습니다. 흔적이 많은 구간에서는 세 걸음에 한 번씩 마주쳐 ‘이거 하나하나 다 기록하고 조사하다가는 설악산을 영영 못 내려가겠다.’는 말이 절로 나왔습니다.

이거 하나하나 다 기록하고 조사하다가는 설악산을 영영 못 내려가겠다 말이 절로 나오게 산양 서식 흔적이 많습니다.

어디 산양 뿐일까요? 케이블카 예정지, 아니 설악산 숲에서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식물들. 눈 측백 초록 잎과 악수하고, 사스래의 하얀 수피를 어루만지고, 분비나무를 가만 들여다보고, 200년 자리를 지켜온 잣나무를 껴안아 봅니다. 하지만 그 잠깐으로는 오랜 시간을 거쳐 설악산에 자리 잡은 풀꽃 나무들의 이야기를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크고 작은 식물들로 빽빽한 숲에서 나는 몹시 이질적이었습니다. 상부정류장과 지주가 들어설 자리를 표시한 붉은 줄과 깃발만이 인간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흔히 인간도 자연의 일부라고 얘기하지만, 환경부의 오색 케이블카 허가 이후 설악산을 찾은 저는 초대받지 않은 불청객, 어울리지 않는 이방인, 누구에게도 환영받을 수 없는 침입자 같았습니다. 나무를 베고, 숲을 파헤치고, 산양을 내쫓은 우리가 감히 자연에 속할 수 있을까요?

절망하지 않고 설악산 편에 서기


작년 2월 27일, 환경부가 오색 케이블카 환경영향평가 조건부 협의, 즉 설악산을 파괴해도 좋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짧은 활동가로서의 삶을 통해 제게 가장 중요한 부분이 된 자연과의 연결감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습니다. 오색 케이블카 통과 이후 전국에 불어닥친 산지 개발의 욕망을 마주하기가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환경단체 활동가인 저에게 2023년 정말 ‘다사다난’했습니다. 많은 것들이 후퇴했습니다. 기후변화의 속도는 빨라지는데 정부는 이 위기를 헤쳐나갈 의지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탈석탄은 요원하고, 재생에너지 확대는커녕 원전 확대에 여념이 없습니다. 바다를 핵 오염수 쓰레기통으로 만들며 국민 안전을 내팽개쳤습니다. 일회용품 규제를 철회하며 국제적 흐름마저 거스릅니다. 이미 실패가 명백히 드러난 4대강 사업을 되살리겠다며 활동가를 압수수색하고, 구속 영장을 청구하기에 이릅니다. 과학도 절차도 무시하며 규제를 완화하는 환경부는 ‘산업부 2중대’ 꼬리표가 붙었습니다. 전 국토에 불어닥친 개발의 광풍은 멈출 줄 모릅니다.

절망은 너무 쉽고, 희망은 어렵고 요원합니다. 그러나 활동가가 어디 쉽고 편한 길을 가던가요? 매일 새롭게 터지는 환경 현안에 몸이 바쁜 것은 고사하고, 절망하려는 마음을 다잡기 어렵지만 언제나 답은 현장에 있었습니다. 잘 닦인 등산로가 아닌 야생동물의 길을 걸어보고, 작은 똥을 쫓으면 산양의 삶을 그려보고, 두 팔을 힘껏 뻗어도 다 안기지 않는 오래된 나무의 이름을 부르다 보면 그대로 아름다운 자연을 만나게 됩니다. 모두 알고 있습니다. 설악산에 두 번째 케이블카는 산양에게도, 우리에게도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산양과 담비와 하늘다람쥐와 눈잣나무와 분비나무, 사스래나무에게 더 많은 편이 필요합니다. 15분 만에 다다를 정상의 풍경 말고, 수백, 수천 년 설악산을 지켜온 생명의 편이 되어주세요. 끝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설악산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케이블카는 절대 들어설 수 없습니다.

글. 박은정(녹색연합 자연생태팀장)
이 글은 홈리스 자립을 위해 활동하는 <빅이슈>에 기고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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