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말>
1993년 일본 도쿄에서 처음 시작된 반핵아시아포럼(NNAF, No Nukes Asia Forum)은 올해로 32년을 맞이했다. 지난 30년 동안 포럼은 핵산업과 각국 정부의 핵 진흥 정책에 맞서 ‘핵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아시아 시민사회의 소중한 연결고리 역할을 해왔다.
제22회 반핵아시아포럼은 5월 15일부터 21일까지 7일간 대만에서 열린다. 이번 포럼에 모인 아시아 반핵 활동가들은 역사적인 순간을 함께한다. 5월 17일, 마안산 핵발전소의 가동이 중단되며 대만은 공식적으로 ‘운영 중인 원전이 없는 나라’가 된다. 이는 수십 년간 독재 정권에 맞서 온 대만 탈핵운동의 결실이자, 오랜 시간 연대해온 아시아 활동가들 모두가 기뻐할 성과다.녹색연합은 반핵아시아포럼 현장에서 각국 활동가들의 목소리를 듣고, 이를 기획 연재로 소개한다.

▲피나르 데미르잔(Pinar Demircan)은 튀르키에 반핵 단체 Nukleersiz에서 코디네이터로 활동하고 있다.
“일본어 통역하다가, 반핵 활동가가 되었어요”
반핵아시아포럼 현장에서 처음 본 피나르 데미르잔은 단번에 시선을 끄는 사람이었다. 일본 참가자들과 자연스럽게 일본어로 이야기를 나누며 웃고 있는 모습, 마치 오래된 동료들과 재회한 듯한 친밀함이 느껴졌다. 그가 일본어에 능숙하다는 사실도 놀라웠지만, 그보다 더 인상 깊었던 건 말에 담긴 진심과 태도였다. 피나르 데미르잔의 반핵운동 여정은 ‘통역’에서 시작됐다. 후쿠시마 핵사고 이후, 일본의 피해자인 모리타 도시야씨가 터키를 방문해 시민 강연을 열었고, 당시 피나르는 일본어 통역을 맡았다. 그는 이후 ‘nukleersiz.org’라는 반핵 단체의 공동 창립자가 되었고, 언론 기고와 강연, 캠페인을 이어가며 시민들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시민이 신뢰할 수 있는 정보를 접할 권리는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공유하는 정보의 정확성과 타당성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며, 필요한 경우 언제든지 전문가 및 과학자들과 협업할 수 있는 네트워크도 갖추고 있습니다.”
대만 탈핵의 순간, 여성의 시선으로
2025년 대만에서 열리는 이번 반핵아시아포럼은 피나르에게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그는 2015년부터 꾸준히 이 포럼에 참석하며 튀르키에의 현실을 국제사회에 알리고 연대를 이어왔다. 하지만 올해는 더욱 특별하다. 대만이 마지막 원자로의 가동을 중단하며, 탈핵 국가로 전환하는 역사적 순간을 현장에서 직접 목격했기 때문이다.
“모든 참가자들이 언젠가 자신의 나라에서도 보고 싶은 장면을 함께 목격한다는 점에서 매우 감격스럽습니다. 독일에 이어 또 하나의 나라가 탈핵으로 전환하는 것은 전 세계에 ‘핵 없는 삶도 가능하다’는 메시지를 보여주는 중대한 사건입니다.”
피나르는 특히 여성으로서 이 포럼에 참여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반핵운동 내부조차 남성 중심 문화가 지배적인 현실 속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더욱 필요하다는 것이다.
“튀르키에를 비롯해 세계적으로 정치 전반에 여전히 남성 중심 문화가 지배적입니다. 반핵운동 내에서도 마찬가지죠. 그렇기 때문에 이 포럼에 여성들이 함께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조건이 허락하는 한 계속 참여하고 싶습니다.”
“여성들은 사회에서 다양한 도전에 직면하며 섬세한 문제 해결 능력과 협업의 감각을 길러왔습니다. 이러한 역량은 환경운동 안에서도 중요한 힘이 될 수 있습니다.”
침묵하는 조직들, 잦아드는 반핵의 목소리
피나르는 오늘날 튀르키에의 반핵운동이 왜 약화됐는지 조목조목 짚었다. 한때 튀르키에 반핵운동의 주축이었던 ‘반핵 플랫폼(Anti-Nuclear Platform)’은 노동조합, 협회, 전문직 단체와 같이 제도적 기반이 있는 조직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에르도안 정권의 권위주의와 경제적 압박 속에서 점점 침묵을 강요당하고 있는 상황이다.
“정치적 압박이 거세지는 상황에서 단체들은 수입이 줄었고, 정권에 비판적인 구성원들은 직장을 잃거나 생계를 위협받았습니다. 이에 따라 단체들은 자신들의 회원을 지키는 데 자원을 우선 사용하게 되었고, 반핵운동은 부차적인 활동으로 밀려났습니다.”
그는 이 흐름 속에서 중요한 교훈을 얻었다. 제도권 조직들의 재정적 지원이 끊기면, 튀르키에의 반핵운동 자체가 지속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지금은 제도권 밖의 개인 활동가들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기다. 그는 정치적 압박 속에서도 행동을 조직할 수 있는 이들의 잠재력에 주목하고 있으며, 그가 국제연대에 힘을 쏟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159km 인간 띠부터 국제 연대까지… 튀르키에 반핵운동의 기록”
피나르는 튀르키테의 반핵운동 역사를 회고하며, 그가 겪은 순간들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튀르키에의 반핵운동은 1990년대뿐 아니라 2016년까지도 매우 인상적인 활동들을 이어왔습니다.”
그는 특히 2011년 후쿠시마 핵사고 직후 벌어진 대규모 시민행동을 상징적인 장면으로 꼽았다.
“후쿠시마 핵사고가 발생한 지 한 달 후, 시민들은 메르신 시내에서 아쿠유 원전 부지까지 총 159km에 이르는 인간 띠 시위를 조직했어요. SNS에서 한 시민의 제안으로 시작된 이 운동에는 1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이 시기는 튀르키에가 러시아와 아쿠유 원전 건설을 위한 정부 간 협약을 체결한 직후였다. 후쿠시마 핵사고가 발생하자 많은 시민들은 “이 참사로 인해 원전 계획이 중단될 것”이라 기대했지만, 현실은 달랐다. 사업은 오히려 계속 추진되었고, 그 이후에도 시민사회의 저항은 이어졌다.
“일본과의 시놉 원전 프로젝트가 추진되면서 체르노빌 사고를 기념하는 대규모 집회들이 곳곳에서 열렸습니다. 2015년 시놉에서 3만 명이 모이는 대규모 집회가 열렸고, 튀르키에 전역에서 시민들이 참여했죠.”
그는 일본 시민사회의 목소리가 결국 일본 정부의 정책에 영향을 미쳤다는 점도 강조했다.
“제가 후쿠시마 피해자들의 증언을 시놉과 이스탄불에서 통역을 통해 시민들에게 전달하면서, 튀르키에 사회의 반핵 인식을 높이는 데 기여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일본 시민사회의 압력이 결국 일본 정부의 시놉 원전 철회 결정에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인터뷰의 마지막, 피나르는 짧고 강한 한마디를 튀르키에어로 남겼다. “Faşizme karşı omuz omuza!” —파시즘에 맞서 연대합시다!
한국에 전하는 경고와 연대의 메시지
피나르 데미르잔은 한국의 핵정책 흐름을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다.
“한국이 원전 기술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핵발전에서 벗어나는 데 오히려 큰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는 또 한국 정치가 현재 튀르키예의 정치 상황과 닮아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포퓰리즘이 민주주의를 잠식하고, 시민사회의 공간을 축소시켜온 튀르키에에의 경험은 한국에 중요한 경고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의 정치권이 튀르키예처럼 포퓰리즘을 활용하고 있습니다. 포퓰리즘이 권위주의로 이어지기 전에, 튀르키예처럼 너무 늦기 전에, 대중 참여와 시민 행동의 중요성을 더 많이 인식하시길 바랍니다. 탈핵운동은 결국 대중의 힘으로 움직여야 합니다.”
인터뷰의 마지막, 피나르는 짧고 강한 한마디를 튀르키에어로 남겼다.
“Faşizme karşı omuz omuza!”
한국어로 자연스럽게 옮기면 “파시즘에 맞서 연대합시다” 정도가 될 것이다. 그가 전한 이 마지막 말은, 국경을 넘어 함께 싸워야 할 시대의 메시지처럼 들렸다.
*위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게시되었습니다.
*담당_글(기후에너지팀 박수홍 070-7438-8510/clear0709@greenkore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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