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플라스틱 파헤치기> 시민 강좌를 마치며
글: 황길모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는 익숙한 문장에서 ‘언젠가’라는 말은 상시 다가오고 있는, 혹은 이미 우리 옆을 서성거리는 죽음을 멀게 느끼게 한다. 그래서 우리는 할 일을 미루고, 누군가를 시기하며, SNS나 짧은 동영상에 빠진 채 마치 죽지 않을 것처럼 산다. 플라스틱에 대한 우리의 태도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이렇게 기온이 오르고, 날씨는 변덕을 부리며, 해류의 순환이 뒤틀리고 있는데도 우리는 플라스틱 통에 든 편의점의 시원한 생수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을 것이라는 데 대해 일말의 의심조차 하지 않는다. 우리는 마치 지금이 영원할 것처럼 산다.
4주 동안 플라스틱을 파헤치다 보니 마주하게 된 것은 플라스틱에 의해 파헤쳐진 지구였다. 플라스틱에 대한 이해가 높아질 수록 지구의 현 상태에 대한 경각심도 더욱 커졌다. 플라스틱은 쉽고, 편하고, 가볍고, 저렴하며 그저 사용 후에 투명 비닐봉투에 분리만 잘해서 버리면 될, 그런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플라스틱은 이미 천문학적인 건강비용을 발생시키며 지속적으로 우리와 다른 생명체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고, 첨가제가 많이 들어가 흔히 생각하는 바와는 달리 재활용이 쉽지 않은 화학 재료였다. 게다가 기술의 발전에 기댄 화학적 방식의 재활용에 대해서도 여전히 회의적인 시선이 많으며, 재활용률은 낮은 가운데 생산량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는 상황 역시 절망적이었다. 온갖 플라스틱 문제는 그대로 지구에 누적되고 있다. 지구는 이미 자신이 그 문제들로 포화상태임을 여러 증상을 통해 우리에게 알리고 있지만 인류의 대응은 너무도 안일하고, 부족하다. 뒤늦게나마 2022년 유엔환경총회에서 플라스틱 오염 종식을 위한 법적 구속력이 있는 국제 협약을 개발하자는 역사적 결의안이 채택되었으나 그 마저도 기득권의 저항과 무관심에 부딪혀 유야무야될 위기에 처해있다고 한다. 자본주의와 물질문명에 취해 있는 인류에 대한 환멸이 일었고, 썩어버린 정치와 경제 시스템을 그저 지켜보고 있을 수 밖에 없음에 무력감을 느꼈다. 강연 내내 이러한 답답한 현실들을 공유하며 강연자들도, 수강생들도 뜨거운 마음들을 쏟아냈다. 누군가는 물질문명이 이룩한 화려한 지구에, 누군가는 플라스틱에 의해 폐허가 된 지구에 살고 있다. 두 세계는 연결될 수 있을까? 우리는 성큼 다가온 죽음의 그림자를 함께 직시할 수 있을까? 탄식과 울분, 희망과 기대가 공존하던 4주 동안 그 감정의 극단들 사이에서 나는 플라스틱에 대해 공부하며 이 어려운 싸움에 대해 생각했다.
음식과 술 그리고 차와 관련하여 사용되는 플라스틱의 좋지 않은 점을 알기 위해 ‘플라스틱 파헤치기’ 강좌에 참여하게 된 만큼 나는 평소 발효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내겐 2강에서 배웠던 미생물에 의한 플라스틱의 생분해가 어려운 이유가 이 싸움의 핵심과 관련하여 유독 직관적으로 다가왔다. 플라스틱의 재료인 합성수지의 고분자 폴리머는 미생물이 파고들 틈이 없을 정도로 그 결합구조가 단단하다. 이 결합구조엔 언젠가 이것을 풀어내야 한다는 의식이 부재한다. 즉 사용한 이후의 폐기 단계를 고려하지 않은 만듦새라는 말이다. 플라스틱과의 전쟁이 어려운 이유는 이렇게 ‘결자해지(結者解之)’가 이루어지지 않는 불(不)순환 구조에 있다. 결자(結者)인 플라스틱 생산자들은 쉽고 빠르게 많이 만들어 내기만 할 뿐 사용 이후의 과정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풀어낼 상황, 즉 폐기 단계를 염두에 두지 않은 이 견고하고 복잡한 매듭은 ‘해(解)’의 짐을 다른 누군가에게 대신 지운다. 그래서 강연 내내 플라스틱의 전 생애주기를 감안한 플라스틱 생태계 내부적인 순환경제를 이루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제시되었던 것이다. 플라스틱 순환경제의 논지를 요약하자면 ‘해(解)’가 여의치 않으니 ‘결(結)’을 줄이고 그나마도 순환 가능하게 하자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시급한 만큼 이에 국제적 강제력을 도입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인류 안에서의 ‘결자해지’를 도모하는 것도 쉽지 않다. 대중은 자기 외의 것에 별 관심이 없고, 자본의 탐욕은 광고와 같은 자극적인 커뮤니케이션들로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정보들을 감추며, AI와 같은 최신 기술들은 우리를 기술의 진보에 기대게 해 당장 필요한 행동들을 유보하게 만든다. 분열의 시대, 자본주의와 과학만능주의의 시대에 필요한 정보들과 필수적인 불편함들은 보이지 않는 곳으로 떠밀려 방치된다. 모두가 ‘결(結)’을 다시 살피려 하지 않고, 어떤 묘수와 같은 ‘해(解)’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이 어려운 싸움의 한 가운데서 나는 우리에게 아주 익숙하지만 간과되고 있는 힘을 떠올려본다. 그것은 식물의 힘, 미생물의 힘, 자연의 힘이다. 독일의 식물학자 페터 볼레벤은 ‘숲의 위기는 인간이 숲을 가꾸고, 보호하는 데에서 시작되었다.’라고 말하며 나무를 심는 일의 비효율성에 대해 말한 바 있다. 그냥 숲에, 나무에, 자연에 맡기는 것이 가장 빠르다는 것이다. 지금은 덧셈이 아닌 뺄셈이 필요한 시간이다. 인간의 문화와 기술을 뒤로 한 발 물러 자연의 호흡과 속도에 맞추는 것 만으로도 전에 없던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자연은 게으른 정치나 경제 시스템보다 더 크고 인간의 이해 너머의 효율로 자생하는 시스템이다. 그것은 느린 듯 하지만 과학 이상의 존재라 충분한 시간만 준다면 오히려 가장 빠르고도 안정적인 결과를 이뤄낼 수 있다. 진정한 순환경제는 자본의 효율이 아닌 지구의 실력과 지구 전체의 에너지 효율을 감안한 활동들에 있다. 플라스틱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논의되는 순환경제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의 접근이리라. 우선 나부터 가능한한 많은 행동을 지구 전체의 순환구조를 염두에 둔 지구와의 연대를 기반으로 진행할 것임을 다짐해본다. 그리고 그러한 행동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자신의 진실을 실천하고 있는 활동가들의 크고 작은 움직임들과 연결되길 바라며 그 연대가 ‘언젠가’를 ‘지금’으로 바꾸어 인류가 눈앞에 당도한 죽음을 함께 직시할 수 있도록 하는데 조금이라도 기여하길 희망한다.
나는 이 강좌를 시작할 때부터 화려한 도시의 이면에서 뜨거운 진실을 품고 사는 활동가들이 있음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 치열하게 활동하며 지구와 인류를 위한 시간을 벌어주고 있는 그들과 나누고 싶은 글을 공유하는 것으로 이 후기를 마무리하려 한다.
“활짝 핀 나무조차 사람들이 그 만개 밑에 가려진 공포의 그늘을 인지하지 않는 순간 거짓말을 한다. ‘얼마나 아름다운가’라는 순진무구한 표현도 아름답지 못한 존재자를 치욕스럽게 하는 구실이 된다. 아름다움이나 위로란 더 이상 없으며, 있다면 그것은 오직 다음의 시선, 즉 공포를 직시하고 감내하며 ‘부정성’에 대한 단호한 의식 속에서도 더 나은 상태에 대한 가능성을 놓치지 않으려는 시선이다.” 테오도르 아도르노 『미니마 모랄리아』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