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장소의 운명을 바꾸는 길

2023.05.30 | 군기지

용산이라는 공간을 마주하면 복잡미묘한 감정이 든다. 개인적이면서 사회적인 편린이 불쑥 떠오르기 때문이다. 옛 사진첩을 펼치면 한국전쟁 참전 군인이셨던 외할아버지를 따라 전쟁기념관에서 찍었던 사진들이 남아 있다. 탱크와 박격포 앞에서 포즈를 취하거나, 전우를 껴안고 있는 거대한 동상에 압도당했던 어린 시절. 전쟁기념관 옆 담벼락과 철조망에 둘러싸인 장소는 들어갈 수 없었는데, 외할아버지는 미군이 주둔 중인 용산기지라고 알려주셨다. 그곳이 120년간 청군, 일본군, 미군의 지배를 받아왔던 주권 밖의 땅이었다는 것, 그리고 바로 인근에 국방부와 전쟁기념관이 부속처럼 자리하게 된 맥락을 이해하게 된 것은 좀 더 시간이 지난 뒤였다.

그 기지가 5월 4일 ‘용산 어린이 정원’이 되어 시민들에게 돌아왔다. 윤석열 대통령이 집무실을 국방부가 있는 용산으로 옮겼고, 미군이 일부 반환한 용산 기지에 공원을 조성하기 시작한 결과다. 언론은 이를 두고 주권의 회복, 한국판 센트럴파크, 새로운 용산 시대의 개막 같은 수사로 장식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공원 부지가 납, 비소, 수은 등의 중금속물질과 크실렌을 비롯한 유독물질, 항공유에 오염되었다는 데 있다. 휘발성 강한 소형 오염물질은 흙에서 노출되면 바람을 통해 호흡기로 들어가 폐를 공격한다. 정부는 이점을 의식했는지 “주 3회 2시간씩 25년을 용산 공원에 가도 문제없다.”고 표명했다. 어릴 때부터 기관지가 좋지 않았던 나는 공원에 얼마나 있어도 괜찮은 것일까? 오염물질은 기저질환이 있거나, 면역력이 취약한 사람들에게 더 치명적인 영향을 끼친다.

기존 용산공원특별법은 용산 기지 전체 반환 시점(N)으로부터 7년간 정화를 거친 뒤 공원을 조성하는 것이었다. 반환 받았다고 끝이 아니라, 오염 정화를 둘러싼 미국과의 지난한 협상이 남아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윤석열 정부는 일부 반환만 이루어진 곳에 정화없이 공원을 조성해버렸고, 오염된 땅에 시민들을 초대하고 있다. 토양환경보전법상 공원이 들어설 수 없는 곳에 ‘임시’, ‘시범’ 개방을 붙여가면서 말이다. 1990년 용산 기지 반환 논의가 시작된 이후, 수십년 간 문제가 이어져 왔던 것은 한미간의 복잡한 이해관계, 환경 주권, 시민의 건강권이 달려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30년의 숙고는 무위로 돌아간 듯하다. 행정 권력의 독주는 과거 용산에서 일어난 어떤 사건과 기시감을 불러일으켰다.

“용산의 아침 작전은 서둘러 무리했고, 소방차 한 대 없이 무대비였습니다. 시너에 대한 정보도 준비도 없어 무지하고, 좁은 데 병력을 밀어넣어 무모했습니다. 용산에서 벌어진 컨테이너형 트로이 목마기습작전은 처음부터 끝까지 졸속 그 자체였습니다. 법과 질서란 목표에만 쫓긴 나머지 실행 프로그램이 없었고 특히 철거민이건 경찰이건 사람이라는 요소가 송두리째 빠져 있었습니다.”

2009년 1월 20일 신경민 앵커가 MBC 뉴스데스크를 마무리하며 했던 논평이다. 옥상 위 망루가 불타오르고, 컨테이너에서 뛰어나온 경찰특공대와 철거민이 뒤엉켜 쓰러져가던 장면을 기억하고 있다. 용산의 어떤 지명들은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아픔을 불러일으킨다. 그곳들에는 어김없이 “사람이라는 요소가 송두리째 빠져” 있었고, 복잡한 맥락의 ‘사건’은 재수 없어서 일어난 ‘사고’로 매도되기 십상이었다. 용산을 유령처럼 배회하던 기지촌 여성들과 철거민들은 모두 어디로 사라졌는가? 미군 기지의 압력에서 벗어나, 수직으로 치솟은 고층 빌딩 숲은 대답해주지 않았다. 이 지역에서 또 다시 ‘사람’은 없고, 개발과 권력의 욕망만 가득한 현장이 되풀이돼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새로운 용산시대가 열리길 기대한다. 그 길은 시민들을 오염된 공원으로 내모는 일이 아니라, 미군과의 협상 테이블에서 원칙을 관철하는 데 있다. 이번 정부의 소임은 전수 조사를 통해 오염원을 철저하게 밝히고, 전 국민이 보는 앞에서 정화 책임을 묻는 것이다. 이것이 정말로 국가 주권을 되찾는 일 아닌가? 대통령의 용산 집무실은 이 과정을 철저하게 수행할 교두보가 되어야 한다. 아울러 권력의 시선이 용산의 지난 역사에 새겨진 상처까지 돌아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때 비로소 이 장소에서 권력자들의 오만을 제어할 수 있는, 새로운 용산 시대가 자리잡지 않을까? 이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대통령의 의지에만 기댈 수 없다. 주권자로서 권력을 위임한 우리들의 감시와 견제가 필요하다. 용산공원 개방 중단에 관심을 갖는 일에서부터 첫 발걸음을 함께 내딛고 싶다.

글쓴이. 박상욱(녹색연합 그린프로젝트팀 활동가)

이 글은 빅이슈 코리아에 기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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