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료들과 헤어지고 서울역 앞에 섰다. 1102번의 의정부 가는 버스를 기다린다. 곧 대선이라고 현란한 빛을 내며 트럭 한 대가 지나간다. 더웠다가 또 추워지는 5월, 오가는 사람의 복장은 계절을 짐작할 수 없게 각양각색이다. 젊은 여자 사람 하나가 지나간다. 그 뒤로는 아빠뻘 아저씨가 지나가고, 교복을 입은 학생이 버스에 오르고, 내 동생 나이의 청년도 뛰어온다. 서울사람들. 대곡리 할머니가 울부짖으며 불렀던 서울사람들이다. 소란스러운 것들 사이로 바람이 불어온다. 여전히 탄내가 나는 것 같다. 씻고 나면 이 냄새가 사라질까, 이불 속에 들어가면 벗어날 수 있을까. 3월 14일부터 발생하여 100,000ha 이상을 태우고 나서야 진화된 산불현장 경북 안동, 의성, 청송, 영덕 일대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대형 산불 이후의 현장을 실제로 관찰하고, 회복의 경로를 함께 고민하기 위해 떠난 녹색연합 활동가들은 산불 피해 지역의 생태 회복 현황을 살펴보고, 일부 복구지의 조림 상태와 자연 복원 흐름을 비교했다. 우리는 피해 주민 인터뷰를 통해 기록 작업을 병행했으며, ‘산불재난 실태조사 체크리스트’를 만들어 사전 예방부터 초기 대응, 상황 대응, 사후 복구에 이르기까지 각 단계별 대응 체계를 점검했다. 이 글은 그 과정에서 마주한 풍경과 질문들을 기록한 것이다.
용암 위에 서 있는 것이 이런 기분일까, 햇볕은 정수리를 얼얼하게 만들고, 눅눅한 열기는 흙 사이로 스며 올라와 숨쉬기조차 어려웠다. 불의 기운이 아직도 남아 있는지, 아니면 그때의 기억을 놓지 못해서인지 숲은 여전히 뜨거웠다. 수천 년을 버텼을 돌조차, 생명 없는 껍질처럼 무너질 만큼 거센 화마였다. 부엽토까지 타버린 땅은 발을 디딜 때마다 푹 꺼지며 아직 식지 않은 열기를 토해냈다. 그 위로 떠돌던 재가 옷을 덮었다. 그저 가볍기만 할 줄 알았던 재였다.
그 숯덩이 같은 땅 위로도 생명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연둣빛 고사리가 바람을 타고 몸을 흔들고, 신갈나무와 굴참나무가 정강이께까지 자라났다. 모두 타버린 자리, 사라진 것들 사이에서 햇볕 한 줌 받지 못한 채 흙 속 깊이 묻혀 있던 씨앗들이 세상 밖으로 올라왔다. 이것은 자연의 회복일까, 아니면 인간이 감히 손댈 수 없는 시간의 일일까. ‘인공조림이냐 자연천이냐’는 물음 앞에 설 때마다, 이토록 불완전한 우리가 무엇을 판단할 수 있을까 싶어졌다.

희미한 회복의 징후들 사이에서, 오히려 더 선명하게 느껴지는 건 부재의 감각이다. 살아남은 것들이 피어나는 그 옆에서, 사라진 생명들의 흔적은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두더지 굴엔 잔해만 남았고, 무당벌레 한 마리만 그 위를 기어 다녔다. 아직 오래되지 않은 야생동물의 배설물이 드문드문 눈에 띄었다. 누군가는 살아남았다는 뜻이다. 그 많은 생명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어디에 숨어 있었던 걸까, 불길을 피할 수 있었을까.
비는 잿더미 뒤집어쓴 나무를 씻고 산을 따라 마을로 흘러간다. 우리는 경북 의성군 점곡면 사촌1리의 이장님을 만났다.
“여그서 피해 본 물건을 찾아야 합니더, 물건 타분 데를 어데서 찾으라꼬, 할매 할배들헌테 사진찍으라하면 우째 찍노”
이장님의 집 두 채와 하우스 다섯 채, 사과나무 오백 주, 묘목값으로 낼 현금 천만 원 등 모든 것이 불에 탔다. 그리고 이젠 8평짜리 임시주택 입주를 기다리며 체육관에서 지내고 있다. 이장님이 거주하는 사촌1리는 한 집을 제외한 아홉 채가 전소해 마을 전체가 사라졌다. 불에 탄 재산의 일부를 보상받기 위해서는 타버린 것들을 증빙해야 한다. 하지만 사촌1리처럼 대부분 고령 인구가 거주하는 마을에서 타버린 물건을 찾아 사진을 찍고, 목록을 정리하는 일은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 스마트폰을 능숙하게 다루지 못하는 어르신들, 타기 전조차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한 삶의 물건들. “어데서 찾으라꼬…”라는 이장님의 말엔, 잿더미가 된 마을을 바라보며 어떻게든 책임을 지려는 애씀과 무력감이 함께 담겨 있었다.

잿더미만 남은 집들, 허물어진 삶의 자리들, 사라진 것들을 셈에 넣는 일은 이제 남은 이들에게 또 하나의 고통이 되고 있다. 덧붙여 화재로 인한 트라우마 치료를 묻자 “밭 일할 시간도 없다”고 답한다. 불길이 순식간에 번지던 그날, 옷장에 넣어둔 묘목값 천만 원이 순간 스쳐 지나갔지만, 이장님은 결국 윗동네 주민들을 향해 차를 몰았다고 한다. 도깨비불처럼 이곳저곳에서 튀어대는 불길 사이를 범퍼가 다 부서지도록 오가며, 이장님은 그렇게 사람을 구했다. 그런 이장님은 정작 자신의 상처를 돌볼 겨를도 없이 여전히 증명 이전의 단계, 생존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경북 영덕군 축산면 대곡리로 옮겼을 때, 마을회관 앞에 앉아 계시던 한 할머니가 소리쳤다.
“서울사람들! 서울사람들! 일 좀 하고 가!”
무너진 삶을 붙잡지 못할 때, 그 절박함은 소리로 터져 나온다. 그때의 나는 그 외침을 등지고, 무시하라는 마을주민의 손짓에 묻혀 도망치듯 떠났다. 그저 마을의 성가신 노인쯤으로 치부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서야 알았다. 그 소리는 단순한 짜증이 아니라, 이 재난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살려달라’는 외침이었다는 것을.
산불 현장에서 우리는 재난의 참혹함뿐 아니라 그 와중에도 버티고 살아남은 것들을 마주했다. 까맣게 그을린 산등성이가 이어졌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미 회복은 시작되고 있었다. 이 회복은 누가 설계한 것도, 지시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자연천이의 과정일 뿐이었다. 불탄 땅 위에서 다시금 생명 다양성이 움트는 시간, 그 고요하면서도 강력한 회복의 흐름은 나에게 속삭였다. 인간이 개입하지 않아도 아니, 어쩌면 서두르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회복이었다는 것을. 하지만 사람은 그렇지 않았다. 누군가의 손이, 곁이, 말이 필요했다. 타버린 삶터에서 몸을 추스르기 위해선 함께 일어설 누군가가 꼭 있어야 했다. 숲은 스스로 회복하고 있었고, 사람은 서로 기대야만 다시 살아갈 수 있었다.

회복은 같은 말이지만, 그 방식은 달랐다. 더욱 조심스럽게 서로의 회복을 다르게 바라보아야 한다.
녹색연합 조직팀 배채은
2025.5.19
*이 글은 빅이슈에 기고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