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기후위기와 불평등 – 지구의 울음과 가난한 이들의 울음

2020.12.26 | 기후위기, 기후위기대응, 활동

버스비조차 없는 이들이 겪는 기후위기

지난 7월 녹색연합은 경향신문과 함께 “기후변화의 증인들”이라는 시리즈를 함께 기획한 바 있다. 일상에서 기후위기에 맞닥뜨린 해녀, 농민, 배달노동자, 산지기 등의 목소리를 담은 기획기사였다. 기자는 서울 돈의동 쪽방촌 주민에게 날씨가 더워지면 제일 힘든게 무엇인지 물었다고 한다. 돌아온 것은 다소 뜬금없이 “병원 가서 매일 주사 맞고 오는게 무척 힘들다”는 대답이었다. 다른 주민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자리를 옮기려던 기자에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강남까지 걸어서 왔다갔다 하니까 더워지면 그게 제일 힘들지…”

알고 보니 A씨는 주사를 맞으러 강남에 있는 대형병원까지 걸어서 다니고 있었다. 가는 데만 4시간, 왕복 8시간 가까이 걸리는 거리였다. “저는 몸에 마비가 자주 오다보니까 다른 사람보다 걷는 데 시간이 더 걸려요. 수급비가 나오긴 하는데 병원비 주고, 방세 주고, 먹을 거 조금 사다두고 하면, (차비로 쓸) 돈이 없어서….”


경향신문. 2020.10.5. 정유진 “쪽방촌 주민A씨의 가난”

기자는 그 말을 듣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고 한다. 에어컨은커녕 버스비조차 없는 가난한 이들에게 ‘기후위기’는 이렇게 다가오고 있었다. 하루 종일 거리에서 아픈 몸으로 온전히 마주해야 하는 현실로.

기후위기의 불평등

지금과 같이 기후변화가 계속된다면, 21세기 후반기에 한국의 폭염일수는 지금보다 3배나 늘어날 것이라고 한다. 쪽방촌 주민에게는 더욱 가혹한 여름이 될 것이다. 폭염만이 아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재난문자가 울린다. 미세먼지로 시작한 재난문자는, 폭염주의보로, 코로나 확진자 소식으로, 장마철 산사태 위기경보로 이어졌다. 기후생태위기는 빈부와 국경을 가리지 않고 찾아들지만, 그 고통은 모두 같지 않다. 재난의 크기는 사회의 불평등한 피라미드를 고스란히 반영한다.

2009-2012년 서울 전체 사망자 3만3천544명을 대상으로 폭염이 지역별 사망에 미친 영향을 조사한 연구에 따르면, 교육수준이 낮고 가난한 사람의 폭염사망위험은 그렇지 않은 경에 비해 18%나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녹지공간이 상대적으로 적은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도 폭염 사망위험이 18% 높게 나타났고, 주변에 병원수가 적은 지역의 경우에도 19% 높은 것으로 확인되었다.(연합뉴스. 2017.7.21. “‘저소득층 폭염 사망위험 일반인보다 18% 높아…지역편차도’”) 2019년에 발간된 ‘유럽의 환경 건강 불평등’ 보고서에 따르면, 기후변화와 같은 환경요인으로 숨진 사람들의 경우, 소득하위 계층이 상위 계층보다 5배나 사망 위험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한겨레. 2019.10.17. “환경위협에 더 취약한 빈곤층, 이대로 둘 것인가”)

도시와 농촌 간의 환경위험 격차도 크다.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이 가장 많은 전기를 소비하지만, 이를 생산하는 핵발전소나 석탄발전소와 같은 위험시설은 서울과 멀리 떨어진 지역에 건설된다. 서울로 전기를 공급하기 위한 송전탑 또한 농촌지역 주민들의 희생 위에 지어진다. 밀양 송전탑을 둘러싼 갈등이 바로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환경정의. 2017.4.3. “OECD 평가로 드러난 지역간 환경 불평등” 참조)

한 국가와 지역 안에서만이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부자 나라와 가난한 나라 사이의 불평등은 심각하다. 전 세계 인구 20% 이하의 소위 선진국들이 전체 온실가스의 70%를 배출한다. 하지만 그 피해는 온실가스의 3%만 배출하는 가난한 나라들에 집중된다. 태평양과 인도양의 작은 섬나라들은 해수면 상승으로 나라 자체를 잃을 위기에 처해 있다. 농업에 의존하는 아시아의 가난한 나라들은 기후변화에 더욱 취약하다. 지난 10월 유엔재난위험경감사무국이 발간한 <2000-2019년 세계 재해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20년 동안 전 세계에서 7384건의 자연재해가 발생하고 40억명이 피해를 봤으며, 해마다 6만명이 재해로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앞선 20년에 비해 재해 수는 1.7배 늘어났는데, 전체 재해의 90%가 기후변화와 관련된 것으로 분석했다. 그런데, 인명피해는 선진국에 비해 저소득국가에서 4배나 많이 발생했다. 홍수, 태풍, 가뭄과 같은 기상이변은 사회안전망을 갖추기 힘들고 재난복구에 충분한 자원을 확보하지 못한 가난한 나라에게 더욱 큰 피해를 안길 수 밖에 없다.

기후변화는 국가간의 불평등을 더 심화시킨다. 1961-2010년 동안 165개 국을 대상으로 한 스탠퍼드대의 연구에 따르면, 기후변화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들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를 17-31% 감소시킨 반면, 선진국의 국내총샌산은 10%나 더 증가시켰다. 기후변화 때문에 최빈국과 최부국의 1인당 GDP 격차는 25%나 더 벌어졌다고 분석한다. 기후위기는 가난한 나라와 부자나라 사이의 간극이 좁아지는 것을 가로막는 셈이다. 선진국이 유발한 기후변화는 나라간의 불평등한 구조를 더욱 공고하게 만들고 있다.

불평등이 낳은 기후위기

기후위기의 결과만이 불평등하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사실 불평등의 사회구조는 기후위기를 일으키는 원인 자체이기도 하다. 우선 지구의 자원을 누가 얼마나 사용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자. 생태발자국은 인간이 지구에서 의식주 등의 삶을 영위하는데 필요한 자원의 생산과 폐기를 토지면적으로 환산한 것이다. 지구가 감당할 수 있는 기준이 1인당 1.8ha이지만, 선진국으로 갈수록 생태발자국 면적은 넓어진다. 선진국에 사는 20%의 사람들이 전 세계 자원의 86%를 소비하고 있다. 기후변화를 일으키는 탄소배출에 있어서도 다르지 않다. 전 세계 인구 20% 이하의 소위 선진국들이 전체 온실가스의 70%를 배출한다. 하지만 그 피해는 온실가스의 3%만 배출하는 가난한 나라들에 집중된다.

선진국-후진국 사이의 문제만이 아니다. 계층 간에도 그 책임이 뚜렷이 차이가 난다. 옥스팜과 스톡홀름 환경연구소가 2020년에 발표한 보고서 <탄소불평등에 직면하다 – 기후정의, 코로나19 위기 극복의 핵심>에 따르면, 1990년부터 2015년까지의 탄소 배출량 중 전 세계인구의 가장 부유한 상위 10%는 누적 탄소배출량의 52%에 책임이 있다. 최상위 1%의 부유층은 15%에 달하는 누적 탄소배출량에 책임이 있다. 반면 하위 50% 빈곤층의 책임은 오직 누적 탄소배출량의 7%에 불과하다. 보고서는 상위10% 부유층의 1인당 탄소발자국을 유럽 평균 수준으로만 줄여도 연간 탄소배출량의 4분의1이 감소할 것이라고 한다.

더욱 주목해야 할 점은, 1990년에서 2015년 사이 누적된 배출총량만이 아니라 ‘증가된’ 배출량이다. 만약 빈곤층에서 배출량 증가 비율이 높다면, 이것은 가난한 이들의 삶의 향상을 위해 불가피하게 탄소배출이 이뤄졌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상위10%는 총 배출량 증가의 46%를 차지한 반면, 하위 50%가 배출량 증가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6%에 불과했다. 다시 말하면, 탄소배출이 “전 인류가 적정한 수준의 삶을 영위하는 목적이 아닌, 소수의 세계 최상위 부자들의 소비 확대를 위해 사용되는 것을 의미한다.”

국가나 계층이 아니라 기업을 대상으로 한 분석에서도 기후위기를 일으키는 불평등한 구조를 확인할 수 있다. 단 100개의 기업이 1988년 이후 전 세계의 온실가스 중 70% 이상을 배출하였기 때문이다. (Guardian. 2017.7.10. “Just 100 companies responsible for 71% of global emissions, study says” ) 엑슨모빌, 셸, BP, 셰브론 같은 다국적 화석연료 기업들이 엄청난 이윤을 누리는 대가가 바로 지금의 기후위기인 것이다. 한국에서도 상위 20개의 온실가스 다배출기업이 국가 전체 배출량의 58%를 차지한다.

그렇다면 기후위기의 기후위기의 책임은 탄소배출로 인해 이익을 누리는 소수의 기업과 부유층, 그리고 부자나라들에게 있다. 바로 불평등한 사회구조가 기후위기를 낳고 있는 것이다. “system change, not climate change”라는 슬로건처럼 기후위기를 멈추기 위해서는 불평등한 구조 자체가 변화해야 하는 이유다.

불평등 없이는 불가능한 체제

상호존중에 기반한 다양성의 관계가 아니라, 위계와 서열에 의한 경쟁구조야말로 현재의 무한한 경제성장을 최고의 가치로 하는 체제의 뿌리이고, 이것이 바로 현재의 기후위기를 야기한 근본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누군가는 가난한 이들을 위해서 더 많은 경제성장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성장의 파이가 커져야 나눌 조각도 생긴다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우선 계속해서 커지는 파이는 애시당초 불가능하다. 지구, 곧 자연환경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유한한 지구에서 무한한 경제성장은 가능하지 않다. 그렇다면 해답은 제한된 크기의 파이를 잘 분배하고 나누는 것이겠지만, 현재의 기득권을 누리는 이들을 결코 이것을 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큰 파이가 큰 이유는 작은 쪽의 것을 가로채고 있기 때문이다.

국왕이 가진 힘의 특징은 국왕 이외의 사람은 국왕이 가진 힘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하는 전제에서 출발한다는 것입니다…왜 돈을 가지고 있으면 힘이 되느냐 하면 그것은 남들이 돈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돈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돈을 필요로 하는 수많은 사람이 있다는 것이 부자의 전제입니다.


더글러스 러미스, 김종철&이반 역, 2002,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 녹색평론사, 85-6

부자나라와 부유층은 오직 불평등한 구조를 전제로 가능하다. 자신들의 힘을 존속하기 위해서는 불평등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더 크고 더 많은 것을 향한 욕망, 이것이 거대한 불평등의 피라미드의 뿌리다. 단지 더 많은 것이 아니라 ‘남보다’ 더 많은 것을 향한 욕망이다. 이 욕망을 부추기고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는 것이 바로 지금의 소비주의 산업 문명이고, 이것이 지금의 기후생태위기를 야기하고 있다. “우리들의 왜곡된 욕망의 구조야말로 이 시대의 고통과 비극의 가장 심원하고 핵심적인 원인”이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보다 많이가 아니라, 보다 다르게 욕망”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김종철, 1985, ‘역사, 일상생활, 욕망’ 김병걸 채광석 편, <역사, 현실, 그리고 문학 – 80년대 대표평론선1> 지양사)

지구의 울음과 가난한 이들의 울음

프란치스코 교황도 낙수효과를 부인하면서 배척과 불평등의 경제체제를 강력히 비판한다.

일부 사람들은 자유 시장으로 부추겨진 경제 성장이 세상을 더욱 정의롭고 평등하게 만들 것이라고 주장하는 ‘낙수 효과’ 이론을 여전히 옹호하고 있습니다. 사실로 전혀 확인되지 않은 이러한 견해는 경제권을 쥐고 있는 이들의 선의와, 지배적인 경제 제도의 신성시된 운영 방식을 무턱대고 순진하게 믿는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 배척된 이들은 계속 기다리고 있습니다.


<복음의 기뿜> 54항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구의 울부짖음과 가난한 이들의 울부짖음은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한다. 환경위기와 사회위기가 별도의 두 위기가 아니고, 기후위기와 사회적 불평등이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환경과 자연환경은 함께 악화됩니다…오늘날 우리는 참된 생태론적 접근은 언제나 사회적 접근이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한 접근은 정의의 문제를 환경에 관한 논의에 결부시켜 지구의 부르짖음과 가난한 이들의 부르짖음 모두에 귀를 기울이게 해야 합니다.


<찬미받으소서> 48-49항

이제 다른 길로 가야한다. “수십 년 동안 이어져온 탐욕스럽고 무책임한 성장을 놓고 볼 때, 우리가 속도를 어느 정도 줄여 합리적 한계를 설정”해야 한다(<찬미받으소서> 193항). 이를 통해서 “발전의 개념을 새로 정의”하고 “새계적인 개발 모델을 바꾸어야 한다”고 교황은 강조한다(<찬미받으소서> 194항). 더 이상 “오렌지 즙을 짜듯” 지구의 자원을 쥐어짜는 것을 멈추고, 북반구 국가와 다국적 기업들이 남반구 자원의 착취를 통해 부를 쌓는 것을 멈추라고 말한다.

2020년 한국 정부는 ‘그린뉴딜’, ‘2050년 탄소중립 선언’ 등을 내어놓았다. 하지만 그 내용을 살펴보면, 기존의 경제성장 중심의 체제를 움켜쥔 채, 기술과 산업육성으로 기후위기를 해결하겠다는 인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구와 사회적 약자를 희생시키는 불평등의 구조 위에서 성장을 지속해온 사회경제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려는 고민과 의지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래서는 지구의 울음과 가난한 이들의 울음에 대한 응답이 되기 어렵다.

지금의 왜곡된 질서를 초기화(reset) 하고, 새로운 질서로 전환해야 한다. 자연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착취를 멈추고 무한 경쟁을 멈춰야 한다. 지구와 가난한 이들이 본연의 생명력을 회복하고, 사회 곳곳에서 정의가 회복되어야 한다. 불평등의 구조를 해체하고 바로잡지 않고서는 지금의 기후위기는 더욱 더 가속화할 것이다. 기후위기를 넘어 기후정의로 나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이 위기의 뿌리를 직시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글 황인철 (기후에너지팀장)

*이 글은 가톨릭평론 2020년 11-12월호의 기고문을 토대로 작성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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