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4 글로벌 기후파업 발언문] 우리가 무사히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

2021.09.24 | 기후위기대응

문재인 정부에 기후위기의 핵심당사자인 청소년, 노동자, 농민, 장애인, 소상공인을 기만하지 말라며 강력히 목소리 내는 진채현 활동가

이하 발언문

우리가 무사히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

얼마 전 TV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청년의 날’을 맞아 청년들과 특별대담을 하는 걸 보았습니다. 그 자리에서 대통령은 청년들이 마주한 어려움을 청년들이 홀로 감당하지 않도록 정부가 최대한 지원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이어 “청년의 고민이 대한민국의 현재이고, 청년의 도전은 대한민국의 미래”라는 희망 가득한 말도 하셨지요.

청년으로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저는 이 말을 믿지 않습니다. 정부는 청년, 아니 모두의 존재를 위협하는 기후위기에 대응할 의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되는 귀중한 시간을 허비하면서 뭔가를 하는 척 시민들을 안심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작년 10월, 정부는 인류의 생존과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2050년까지 탄소중립을 하겠다고 선언하였습니다. 2050년 탄소중립을 위해선 2030년까지 온실가스를 절반 이상 감축하는 것이 필수적이지만, 정부는 2030년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35%에 두었습니다. 온실가스를 배출해온 역사적인 책임을 고려한다면 터무니없는 수치입니다. 기후위기 대응의 책임을 방기하고 모두의 미래를 위협하면서 ‘희망’, ‘미래’와 같은 말로 시민들을 기만합니다.

지난 봄, 문 대통령은 기후위기 대응 등 ‘지속가능한 성장’을 논의하는 P4G 국제회의에서 대한민국이 기후위기 대응을 잘하고 있으며 기후위기 대응을 선도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국내외에선 10기의 신규 석탄발전소 건설하고, 가덕도 신공항 같은 탄소 다배출 토건 사업을 그대로 추진하면서 말입니다. 그 자리엔 국내 온실가스 배출 1위 기업 포스코 최정우 회장과 호주에서 가장 많은 온실가스를 배출할 가스전을 짓고 있는 SK 최태원 회장을 연설자로 초대하였지요. 기후위기는 자본주의와 산업성장사회 시스템에 의해 자연을 착취한 결과이지만 정부는 국민들을 우롱하듯 탄소다배출 기업과 손잡고 기후위기 대응을 약속하였습니다.

지난 5월, 대통령 직속 산하 기구 탄소중립위원회엔 가장 목소리가 반영되어야 할 기후위기의 핵심 당사자인 청소년, 노동자, 농민, 장애인, 중소상공인은 배제되었고, 포스코와 SK E&S 등 온실가스 다배출 기업 인사들이 줄줄이 들어갔습니다. 탄소중립위원회에서 탄소중립을 포기한 시나리오를 만들고는 ‘공론’의 이름으로 그 책임을 그 자리에 있었던 시민들과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떠넘깁니다.

청년의 고민이 대한민국의 현재라고 하셨지요. 20대 여성 청년인 저의 여름은 이랬습니다. 올여름 연이은 폭염과 열대야로 숨을 제대로 쉴 수 없는 지경이었습니다. 단열이 잘 되지 않는 집에서 에어컨을 잠시라도 끌 때면 폭염에 그대로 노출되었고, 17일 간의 열대야에 새벽까지 잠 못 이뤘습니다. 뜨거운 바람을 내뿜는 실외기 앞에선 새끼 고양이들이 야윈 몸으로 힘 없이 숨을 헐떡이는 걸 보았고, 에어컨이 없어 목숨을 잃은 장애인의 소식을 접했습니다. 찜질방 같은 더위로 가만히 서있지도 못하겠는 길 위에서 야쿠르트 판매원이 하루 종일 서있는 것을 보았고, 폭우로 미끄러운 차도 위에서 배달 노동자가 위태롭게 일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SNS에선 터키 산불로 화마에 휩싸여 어찌할 바 모르는 소들과 산 속에서 말 그대로 비명을 지르는 새들의 목소리를 접했습니다.

100년 만에 가장 일찍 핀 벚꽃, 서유럽에 내린 100년만의 폭우, 1000년에 한번 일어날 만한 미국 서부의 폭염, 49.5도를 기록했던 캐나다, 51도의 폭염을 겪은 이라크, 하루에 1년 치의 비가 내린 중국, 120년 만에 가장 더운 6월을 기록한 모스크바 모두 올해의 일입니다. 기후위기에 가장 책임이 없는 지역의 사람들은 기후위기로 인한 내전과 가뭄, 식량 위기를 온 몸으로 겪습니다. 하루 하루 일상 속에서 마주하는 기후위기의 징후와 기후재난으로 목숨을 잃는 이들의 소식을 받아들이기 벅찰 지경입니다.

같은 해, 억만장자들은 수십, 수백 억원 대의 우주 여행을 즐기며 어마어마한 양의 이산화탄소를 배출했습니다. 우주에서 지구의 아름다움과 연약함에 경이로움을 느꼈다며 위태로운 지구를 불구경하곤, 인류의 미래를 위해 우주로 가는 길을 건설하겠다는 망언을 일삼습니다. 법과 제도는 베트남과 인도네시아에서 5억 톤의 온실가스를 배출할 석탄발전소를 짓는 두산중공업의 행태는 방관하고, 이에 저항한 시민들의 행동을 범죄로 만듭니다.

얼마 전,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인 IPCC가 2030년 중후반이면 1.5도 상승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보고서를 발표했지요. 과학자들의 보수적인 전망치 조차 10년 안에 세상을 뒤집는 수준으로 온 세상이 싸그리 바뀌어야 한다고 하지만, 정부가 기후위기의 주범인 산업계와 손을 맞잡고 시민들에게 그 책임을 떠 넘기는 이 현실 속에서 두려움에 몸서리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친구들과 만나면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잘 하지 않습니다. 10년 후, 20년 후에 우리가 과연 살아있을지, 기후 재난으로부터 안전할지, 우리가 과연 할머니가 될 수 있을지 이야기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추석 때 만난 13살, 16살의 사촌 동생들에게는 기후위기에 대한 이야기를 차마 꺼내지 못했습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고 살지만 기후위기로 가장 큰 영향을 받을 이들에게 국가가 당신들의 미래를 져버리고 있다는 것을 차마 이야기할 수 없었습니다.

정부에게 묻고 싶습니다. 정부는 2030년 온실가스 감축 목표 미달이 모두의 미래를 위협한다는 것을 진정 알고 있습니까? 정부는 온실가스 배출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 산업계와 부유층을 규제할 의지가 없으면서 기후위기로 가장 큰 피해를 입는 세대에게 감히 희망을 말할 수 있나요? 정부는 2030년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절반 이상 줄이지 않은 채 기후위기의 최전선에 놓인 지역, 계층에게 감히 미래를 말할 수 있나요?
정부는 10년 안에 세상에 완전히 뒤집힐 만큼 모든 시스템을 전환해야 한다는 과학자들의 엄중한 경고를 받아들이고, 온실가스를 배출해온 역사적인 책임에 합당한 2030 온실가스 감축 목표로 상향하십시오. 정부는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척하는 행세를 중단하고,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최우선에 두십시오. 기후위기에 대한 논의는 기후위기의 주범들이 아닌 기후위기로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사회구성원들의 삶에서부터 시작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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