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기후위기의 뿌리, 성장주의 넘어서기

2022.03.05 | 기후위기대응

2021년 11월 영국 스코틀랜드의 글래스고에서 제26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6)가 열렸다. 라 불리는 이 회의에 세계 각국의 정부 대표와, NGO, 기업 등을 대표하는 이들이 모였다. 매년 2주간 열리는 COP회의에서는 북반구 국가(선진국)과 남반구 국가(개발도상국)의 이해관계가 부딪히며 치열한 협상이 벌어진다. 지구기온상승으로 이미 치명적인 피해를 겪고 있는 태평양의 섬나라나 방글라데시, 필리핀 등의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나라들은 보다 과감한 온실가스 감축을 요구한다. 나아가 그동안 역사적으로 빠른 경제성장 과정에서 온실가스를 많이 배출한 선진국들이 피해 보상 등의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선진국들은 상대적으로 재난에 대비할 여력이 크고 이미 온실가스를 많이 배출하는 산업들이 국가경제의 기반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기후위기 대응에 미온적이다. 더군다나 남반구 국가들이 요구하는 기후위기 책임에 대해서는 부담을 회피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세계 기후활동가들도 매년 열리는 COP 회의를 주목한다. 올해도 글래스고로 세계 각지의 기후활동가들이 모였다. 11월6일을 세계기후정의 행동의 날로 정하고 수십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글래스고 회의장 주변에서 행진을 진행하였다. 기후운동가들은 “회의장에 모인 이들에게 무언가 요구하거나 기대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책임을 묻고 규탄하고, 거리에 나선 이들이 바로 해결의 주체가 될 것이다”고 이야기했다. 코로나를 이유로 열리지 못한 2020년을 제외하고 27년 동안 매년 COP회의가 개최되었지만, 이제껏 기후위기를 해결하지 못한 채 공허한 회의만을 반복하고 있다는 비판이었다. 기후위기 해결을 지도자들에게만 맡겨 둘 수 없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COP26 주최국인 영국은 석탄을 이용한 산업혁명이 시작된 나라이기도 하다. 영국은 이번 회의에서 “석탄을 역사 속으로 보내자”는 슬로건을 내세웠다. 한국 정부는 어떤 입장을 보였을까? 회의에 참석한 문대통령은 연설을 통해서 2030년까지 40% 온실가스 감축(2028년 대비)을 공표했다. 또한 2050년까지 석탄발전을 종료하겠다고 국제사회에 공식적으로 밝혔다. 하지만 이런 한국 정부의 입장은 자랑스레 내세울만한 것은 아니었다. 한국의 2030년 감축목표는 이미 시민사회로부터 1.5도 목표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거센 비판을 받은 바 있다. 게다가 세계에너지기구 등은 한국을 비롯한 OECD 국가들이 2030년까지 탈석탄을 해야한다고 밝힌바 있다. 그 와중에, 한국이 2050년까지도 석탄발전을 유지하겠다는 것은 선진국이라는 위상에 걸맞지 않는 부끄러운 수준의 정책이다. (한국은 세계 경제 10위 권의 선진국이다!) 더군다나 더욱 부끄러운 일은 그 다음에 벌어졌다. 대통령의 2050탈석탄 선언 후, 영국이 제안한 ‘석탄에서 청정에너지로의 전환을 위한 세계선언’에 한국의 산업부장관이 서명한 사실이 알려졌다. 이 선언 내용에는 석탄발전의 시대를 종식하기 위해, 선진국들은 2030년대까지, 나머지 국가들은 2040년대까지 석탄발전을 종료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현지의 언론들은 한국이 서명한 사실에 주목하였다. 한국이 2050년보다 훨씬 진전된 2030년 탈석탄을 표명한 것으로 이해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부(산업부)의 해명은 납득하기 어려웠다. 이 선언은 ‘원론적인 내용’에 불과하고, ‘노력’을 약속한 것 뿐이라는 식으로 그 의미와 책임을 축소, 폄하했다. 결국 또 하나의 공허한 약속을 더한 셈이다.

2주간의 COP26는 11월13일 폐회했다. 합의문 초안에는 석탄발전의 ‘단계적 퇴출’이 담겼으나, 최종합의문은 ‘탄소저감장치가 없는 석탄발전의 단계적 감축’으로 후퇴했다. 석탄발전은 온실가스 배출이 가장 많은 발전원으로 기후변화를 일으키는 주요 요인 중 하나로 꼽힌다. ‘퇴출’이 ‘감축’으로 후퇴한 것만이 아니라 ‘탄소저감장치가 없는’이라는 조건을 추가함으로써 석탄발전의 수명연장의 여지를 남겨두었다. 또한 합의문에는 ‘비효율적인 화석연료 보조금의 단계적 중단’도 담겼다. 이 또한 ‘비효율적인’이란 수식어가 붙으면서 화석연료 보조금의 지속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었다. ‘비효율적인 화석연료 보조금’이 불분명하고, 석탄 외에 석유와 천연가스에 대한 제한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는 것도 합의문의 한계로 지적된다.

국내외 언론은 COP26에 대해 ‘석탄과 화석연료의 제한을 최초로 합의’한 것을 의의와 성과로 언급했다. 하지만 과연 이것을 성과라고 할 수 있을까? 화석연료의 사용이 기후변화의 원인임이 밝혀진 것은 이미 오래 전 일이다. 그런데 기후변화 해결을 목적으로 한 회의를 27년 동안 개최하면서도, 화석연료 사용 제한에 대한 논의가 없었다는 것이 놀랍지 않은가. 기후변화를 막자고 하면서 정작 기후변화의 핵심 원인는 그동안 건드리지도 못했다는 것이다. 이토록 화석연료 제한에 대해 미온적이었던 것은, 막강한 탄소 메이저 기업들의 이해관계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단 100개의 기업이 전 세계 이산화탄소 배출의 70%를 차지하고 이 기업들은 대부분 석탄, 석유, 가스 등의 화석연료 산업에 기반하고 있다. COP26에 참석한 대표단 가운데 화석연료 업계 인사들이 가장 많은 것으로 밝혀졌다. 러시아, 브라질 등 27개 국가의 공식 대표단 가운데에는 화석연료 업계 로비스트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는 그동안 ‘화석연료’ 대신 ‘온실가스’에만 초점을 맞춰왔다. 석탄, 석유 등의 사용을 제한함으로써 온실가스 발생을 줄이는 확실한 선택을 외면했다. 대신 기업들이 탄소배출권을 사고 팔수 있도록 한다든지 이산화탄소를 포집 저장하는 기술과 같은 시장과 기술 중심의 불확실한 수단에 매달려왔다. 그리고 그 결과가 무엇인가? IPCC는 1.5도 이상 상승하지 않기 위해서 2010년 대비 45%를 줄여야 한다고 했다. COP26에 각국이 제출한 2030년 온실가스 감축목표를 종합한 결과는 2010년 대비 13.7% 증가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지금대로면 지구 평균기온이 1.5도를 훌쩍 넘어 2.4도 이상 오를 것으로 전망된다.

27년만에 화석연료를 논의하는 판국이니, 기후위기를 일으킨 근본적인 원인, 바로 ‘성장주의’를 얘기하는 것은 기대조차 힘들다. ‘성장주의’란 무엇인가? 인간의 구체적인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경제성장과 자본의 확대 그 자체를 목적으로 추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성장주의야말로 자본주의의 본 모습이다. 사람들은 앉기 위해 의자를, 농사를 짓기 위해 호미를, 요리를 하기 위해 칼을 필요로 한다. 직접 만들거나 시장에서 구입하기도 한다. 구체적인 필요와 사용을 위해서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자본가는 다르게 사고한다. 그들이 생산하고 판매하는 목적은 이윤을 남기기 위함이다. 이윤은 더 많은 이윤을 내기 위해 투여되고, 그렇게 획득한 이윤은 또다시 자본이 되어 더 많은 이윤을 낳는다. 단순히 자본가가 탐욕스러워서가 아니다. 어떤 기업이 투자자로부터 투자를 받는다면 매년 이자를 지불해야 한다. 이것이 가능한 유일한 방법은 끝없이 자본이 성장해야만 한다. 자본주의에서 경제성장률은 절대적인 기준이 된다. 만약 세계 경제가 매년 3%씩 성장한다면 경제총생산은 23년 뒤에 두배, 50년 뒤에 4배, 100년 뒤에 20배로 기하급수적으로 커진다. 실제 인류의 역사 속에서 2차 대전 후부터 ‘거대한 가속’이라 불리는 급속한 생산과 소비의 증가가 진행되어 왔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식의 영원한 성장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구의 유한성 때문이다. 경제성장에는 필연적으로 에너지와 자원의 소비가 함께 뒤따르지만, 지구의 생태환경이 감당할 수 있는 명백한 한계가 존재한다. 기후위기로 인한 지구온도 상승이 바로 그런 한계 상황을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지구 온도 상승을 1.5도 이내로 제한한다는 것은, 화석연료의 사용을 제한하는 것 만이 아니라, 경제성장의 제한 내지 축소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누군가는 일부 국가들에서 보여주는 ‘디커플링’ (탈동조화현상. 경제는 성장하나 온실가스는 줄어드는 현상) 현상을 제시하며 기후변화도 막으면서 경제성장이 가능하다(녹색성장)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하지만 많은 연구에 따르면 이런 디커플링은 탄소배출 산업을 한 국가에서 다른 나라로 이전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지, 전 세계 차원에서는 불가능한 시나리오라고 말한다.

2019년 유엔 기후행동 정상회의에 참석한 그레타 툰베리는 각국의 정상들에게 이렇게 일침을 놓는다. “생태계 전체가 무너져 가는데 무한한 경제성장이나 돈이나 논하고 있다니 염치도 없나요?” 정말 기후위기를 막고자 한다면, 성장을 제일의 가치로 삼아 굴러온 지금의경제체제에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 GDP가 국가의 절대 목표인 현실에 이의를 제기해야 한다. 누군가는 경제성장을 포기하는 것이 현실가능한가 물을 수도 있다. 하지만 생각해 보자. 지금과 같은 형태의 경제시스템은 고작 200여 년 밖에 되지 않는다. 그 이전에 인류는 경제성장을 절대 목표로 삼지 않고서도 생활을 영위해 왔다. 우리의 상상력이 ‘경제성장’이라는 신화 앞에서 멈춰설 이유는 없다. ‘탈성장’의 새로운 사회를 위한 상상력이 필요하다.

‘탈성장’은, 경제난으로 시민들이 실직가 빈곤의 나락에 떨어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탈성장은 “에너지와 자원의 과도한 사용을 계획적으로 줄임으로써 경제가 안전하고 정의로우며 공정한 방식으로 생명세계와 균형을 이루게 하는 것”이다. 경제의 어떤 부문들(대중교통, 재생에너지, 공공주택 등)은 확대하고, 어떤 부문들(호화주택, 공장식 축산으로 생산된 소고기, 개인 전용기, 군비 등)은 적극적으로 축소해 가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금욕주의나 빈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의 ‘좋은 삶’(Buen vivir)을 영위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곧 대통령선거가 진행된다. 이 사회가 어디로 가야할지에 대한 비전과 정책이 논의되는 자리가 곧 선거여야 한다. 하지만 이런 토론은 정쟁 앞에 실종된지 오래다. 거대 정당의 유력 후보 누구도 기후위기 극복을 위한 진정한 대안을 보여주고 있지 못하다. 경제성장을 넘어서는 비전은 기대조차 어렵다. 결국 답은 주권자인 시민들에게 있다. 대통령은 절대왕조의 군주도 아니고, 세상을 구원하는 메시아도 아니다. 그 누가 대통령이 되건, 그 권력이 올바로 쓰이는지 깨어서 지켜보고 목소리를 내는 시민이 있어야 한다. 유권자라 함은 곧 정치의 주체임을 말한다. 선거는 시민들 스스로가 정치의 주체로서 우리가 바라는 사회를 상상하고 토론하는 자리여야 한다. 진정 기후위기를 해결하려 한다면 경제성장이라는 거대한 신화에 도전할 때다.

글쓴이: 황인철 (기후에너지팀)
*이 글은 <산위의 마을> 제41호(2021.12)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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