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대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 동물이 있습니다. 200만 년 전에 출현해 소과 동물의 진화적 특성을 그대로 간직한, 살아있는 화석이라고도 불리는 산양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산양하면 흔히 요새 유행하는 산양유를 많이 떠올리시지만 멸종위기종 산양은 명칭에 양이 붙을 뿐 산양유와는 전혀 상관없는 존재입니다.
산양은 험준한 산악지대에서 살아가는 국제적 멸종위기종으로 세계자연보전연맹의 멸종위기종 리스트(RED LIST)에 취약종으로 등재되어 있으며 멸종위기종 1급, 천연기념물 217호로 지정되어 보호받는 종입니다. 해발 고도 500m이상의 산림지대 중에서도 가파른 절벽과 암벽이 많은 지형을 선호하며 야행성이기 때문에 산을 좋아하는 분들이라도 쉽게 마주치기 어려운 동물입니다. 남한에서는 경기강원북부의 DMZ 인근, 설악산, 월악산, 태백-삼척-울진-봉화로 이어지는 낙동정맥 산림지대가 주요한 서식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과거에는 깊은 산속에 들어가면 흔하게 볼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지만 현재는 남한 지역 전체 개체수가 800개체 미만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산양을 찾아 산을 오르는 일은 힘겹고 고된 한 편, 재충전과 사유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KTX정차역에서 내린 뒤 렌트카를 빌려 지방도와 국도를 2시간 남짓 달려서 탐방로 입구로 향합니다. 잘 닦인 탐방로를 오르다가 GPS 어플에 표시된 야생의 길로 들어섭니다. 이 때부턴 두 발이 아닌 네 발 산행이 시작됩니다. 그렇게 깊은 산 속에 들어서면 어느 순간 야생의 길 위에 커피콩 같이 생긴 산양의 똥자리가 보입니다. 윤기가 흐르는 배설한 지 얼마 안 된 산양의 똥에서는 향긋한 숲의 향이 납니다. GPS 좌표를 기록하고 사진을 찍고 조사용 무인센서카메라의 메모리 카드를 확인합니다. 바로 몇 시간 전의 새벽녘에 산양이 다녀간 것을 확인하면 설렘과 감격을 느끼곤 합니다.
메모리 카드에는 산양을 비롯해, 담비, 삵, 너구리, 오소리, 족제비, 아기 멧돼지, 청설모, 다람쥐가 찍혀 있습니다. 담비는 늘 다른 친구와 재빠르게 뛰어다니며 장난을 칩니다. 오소리는 야심한 시각에 조심조심하는 걸음걸이로 가족들과 함께 지나갑니다. 너구리는 다른 동물들의 똥냄새를 하나씩 맡아 봅니다. 야생의 존재들은 이 깊은 산속에서 저마다의 일상을 보내며 공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서울로 돌아오는 기차안에서 야생의 눈으로 문명을 생각해 보곤 합니다.
울진, 삼척, 봉화로 이어지는 산림지대는 백두대간의 낙동정맥에 해당하는 지역입니다. 산양의 집단 서식지로도 중요한 곳이며 국제적으로는 최남단 산양 서식지에 해당합니다. 높은 봉우리와 울창한 산림, 기암괴석은 산양과 다른 다양한 야생의 존재들이 서식하기에 훌륭한 생태 환경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야생의 생명력으로 가득한 이곳은 기후 재난의 시대로 진입한 지금 위험한 장소, 대형 재난에 취약한 장소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작년, 울진·삼척에서 발생한 대형산불은 가장 긴 시간 동안 가장 많은 면적의 숲을 불태웠습니다. 피해 면적이 여의도 면적의 70배로 한국도 기후변화로 인한 대형산불 피해에 예외 지역이 아님을 무섭게 깨닫게 한 사건이었습니다.
기후변화는 대형산불을 야기하고 대형산불은 울창한 산림에서 더욱 쉽게 발화합니다. 조사를 위해 산에 오르면 밖에서는 잘 보이지 않던 능선 곳곳에 빼곡하게 들어선 송전탑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조금 높은 능선에서 바닷가 쪽을 바라보면 핵발전단지, 엘엔지(LNG) 기지가 눈에 들어옵니다. 인간의 과도한 편의를 위한 발전단지와 송전탑이 인간에 의해 야기된 기후재난 산불과 만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까 두렵습니다. 지난 산불 당시 무인카메라에는 평소에 잘 가지 않던 도로 근처까지 이동하는 산양과 야생동물의 모습이 포착되었습니다. 개발로 인한 서식지 파괴와 무분별한 밀렵으로 개체수가 급격히 줄어든 산양은 기후재난의 시대에 가장 위험한 곳에서 서식하는 종이 되었습니다. 물론 산양에게만 해당하는 위험은 아니겠지요.
장애인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봤을 때 세상이 얼마나 불평등하며 폭력적인지 느꼈던 적이 있습니다. 그 연장선에서, 야생종의 눈으로 현재의 우리를 바라보며 새롭지만 오래된 폭력을 새삼 마주하고 있습니다. 케이블카, 송전탑, 새로 건설 중인 핵발전소와 석탄발전소, 여전히 채굴 중인 석회 광산, 많은 토건 개발 사업이 인간인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만이 아니라 자연과 야생종에게 미치는 영향을 생각할 수 있으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더 필요한 것일까를 곱씹게 됩니다. 안타까운 것은 기후변화의 가속과 생물다양성의 악화는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당연한 명제는 너무나 당연하기에 오히려 설득하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자연과의 공생, 공존을 말하는 것은 그래서 더욱 어려워 보입니다. 매일의 일상에 녹초가 된 사람들에게 자연은 너무나 추상적인 말 같습니다. 최근 독립영화계에서 작은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수라”라는 작품에서 오동필 선생님은 이런 말을 합니다. “아름다움을 본 죄” 새만금 갯벌에 서식하는 새들의 아름다움을 본 죄로 새만금에 아직 남아 수라 갯벌을 지키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얼마 전까지는 사냥꾼과 올무를, 그 뒤에는 광산과 임도를, 송전탑을, 직선도로와 터널을 피해야 했던 산양과 야생동물은 이제 산불을 피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꿋꿋하게 야생에 남아 주어진 일상을, 자신들만의 삶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사진 한 장을 여러분과 함께 보고 싶습니다. 저는 조사카메라에 우연히 찍힌 이 사진 때문에 산양과 울진·삼척과 야생에 대해 마음을 쓰게 되었습니다. 곁에 남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미 산양은 먼 산을 바라보며 되새김질을 하고 있습니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기 산양은 어미 꽁무니에 기댄 채 잠들었습니다. 곧 독립을 앞둔 또 다른 산양은 어미 곁을 어슬렁거리며 거리를 두고 어미와 동생 곁에 머무는 중입니다. 사진 밖으로는 산불로 인해 그을린 나무들이 즐비한 검은 숲이 펼쳐집니다. 어미 산양이 바라보는 먼 산 언저리에는 송전탑이 동-서로 이어지고 오른쪽 숲의 끝에는 핵발전소의 돔이 푸른 바다와 함께 보일 테지만 아직은 오래된 야생의 평화를 누리는 중입니다.
야생은 우리 곁에서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많은 생명과 함께 살아가고 있음을, 물러나는 동시에 밀려오는 파도와 같은 감각으로 늘 떠올려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글 : 녹색연합 자연생태팀 김원호
- 이 글은 빅이슈 코리아 309호에 게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