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위를 빠르게 지나가는 자동차 불빛이 보입니다. 그 옆으로 야생동물 두 마리가 위태롭게 서 있습니다. 경상북도 울진군 36번국도에 나타난 멸종위기야생동물 산양입니다. 산불로 서식지를 잃은 산양들이 새로운 터전을 찾아 이동하는 과정에서 도로에 가로막혀 고립된 모습입니다.
지난 3월, 울진에서 발생한 대형산불을 기억하시나요? 역대 최장시간, 최대피해면적이라는 기록을 남긴 울진산불은 사람뿐만아니라 숲에서 살아가는 야생동물에게도 큰 피해를 남겼습니다. 울진삼척지역 약 20,000ha의 숲이 불에 탔는데요, 그 중에는 멸종위기종 산양의 서식지 4,353ha(약 1,316만평)도 포함되어있습니다. 집 잃은 산양들은 어디로 갔을까요?
녹색연합 활동가들은 3월부터 6월까지 총 8차례 울진지역 산양 서식지 산불 피해 조사를 진행했습니다. 기존에 발견된 산양 서식지 중 산불피해를 입은 구역과 불을 피해 이동했을 것으로 예상되는 지역에서 서식흔적을 기록하고 무인카메라를 설치해 관찰했습니다.
산양들의 보금자리는 산불로 크게 훼손되어 있었습니다. 산양은 주로 산 능선부 가까이 있는 사면에 시야가 탁 트인 암석지대에서 머무르기를 좋아합니다. 특히 꼬리진달래 등 봄철 먹이 식물이 풍부한 곳을 중심으로 서식흔적이 많이 발견됩니다.
산불 이후 다시 찾은 서식지는 까만 재로 뒤덮여 있었습니다. 바닥에는 불에 그을린 산양 분변만 남아있었습니다. 산불로 먹이 식물이 불타고 연이어 계속된 가뭄으로 물까지 구하기 어려워지면서 기존 서식지를 두고 다른 터전을 찾아 이동한 것으로 보입니다. 산양 먹이와 함께 무인카메라를 설치하고 관찰해보았지만 3월부터 5월까지 단 한마리의 산양도 기존 서식지에서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반면, 산불 이전에는 서식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던 도로 주변에서 대형분변자리가 발견됐습니다. 산양은 소리에 민감해 도로에서 1km 이상 떨어져 살아가지만 산불로 서식 공간이 줄어들면서 새로운 터전을 찾아 위험을 무릅쓰고 도로까지 내려오기 시작한 것으로 보입니다.
산양들은 주로 차량 운행이 적은 오후 9시부터 오전 5시 사이 도로변에 나타났습니다. 산불로 먹이가 부족해진 3월에서 4월 사이에 출현 빈도가 가장 높았습니다. 3월 17일부터 4월 17일까지 30일간 산양이 무인카메라에 촬영된 일수는 총 14일로 이틀에 한 번 꼴로 도로변에서 발견됐습니다. 산양들은 도로 인근에서 먹이를 먹거나 분변활동을하며 서성였습니다. 오랜 시간 가만히 서서 도로를 지켜보기도 했습니다. 몇몇 산양들은 유도팬스가 끊긴 지점을 통해 도로 가까이 접근하기도 했습니다.
현재 울진군 산양 서식지는 기존 36번국도와 신규 36번국도로 인해 이중으로 단절되어 있습니다. 36번국도 주변에는 산양 뿐만아니라 수달, 삵, 담비, 하늘다람쥐 등 멸종위기에 처한 야생동물들이 살고 있습니다. 산불 피해를 입은 울진군 북면에 서식하는 동물들이 남쪽 왕피천 서식지로 내려가기 위해서는 도로를 두 번이나 건너야 하는 상황입니다.
36번국도에 조성되어 있는 생태통로를 가보았습니다. 유도울타리 곳곳에 단절된 지점이 있었습니다. 유도울타리는 동물들이 생태통로로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도록 유인하는 시설입니다. 만약 유도울타리에 단절지가 있을 경우 야생동물들은 멀리 떨어진 생태통로가 아닌 가까운 단절지를 통해 도로로 진입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울진군 36번국도 생태통로와 터널 구간 16곳에서 유도울타리 부실 설치 8곳을 발견했습니다.
1950년대까지 전국 높은 산에서 흔히 만날 수 있었던 산양들은 밀렵과 개발로 인한 서식지 파괴로 개체수가 크게 줄었습니다. 2019년 기준 전국에 약 1,300명이 남아있습니다. 울진삼척은 산양 120명 이상 살고 있는 우리나라에 얼마 남지 않은 산양 집단 서식지입니다. 그럼에도 울진삼척지역 산양들은 오랜시간 별다른 국가적 보호를 받지 못했습니다. 2010년부터 2020년까지 58명의 울진·삼척지역 산양들이 로드킬을 당하거나 아사했습니다.
이번 산불로 산양 서식지는 더욱 줄어들고 파편화되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울진군은 올 봄 두 차례의 산불로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 되어 응급대책과 재난 복구를 위한 다양한 대책들이 마련되고 있습니다. 특별재난지역에 대한 대책에는 숲에서 살아가는 야생동물에 대한 고려도 함께 되어야 합니다. 서식지를 잃은 동물들이 어떤 경로로 이동했고 어떤 보호조치가 필요한지, 기존 서식지로 돌아오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에 대해 정밀한 조사가 그 어느때보다 필요합니다. 갈 곳 잃은 생명들이 더 이상 길을 잃지 않도록.
글 박성준 활동가
이 글은 <빅이슈>에 실린 원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