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9일, <2023 그린컨퍼런스 – 야생하다>가 상암 에스플렉스 센터에서 열렸습니다.
컨퍼런스 주제인 ‘야생하다’라는 말이 어떻게 다가오시나요? 오랫동안 저에게 야생은 경이로운 미지의 대상이거나, 거칠고 예측할 수 없는 위협을 가진 공간으로 그려졌습니다. 마땅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날 것의 자연생태계가 순환하는 곳이어야 했고요. 그러나 이번 컨퍼런스는 ‘야생’에 대한 다양한 가치를 구체적으로 생각해보는 데 초점을 맞춰봤어요. 야생의 이미지가 단일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가는 것에서부터 각자의 연결고리가 시작될 수 있으니까요.
우선 본격적인 강연 시작에 앞서, 행사장 앞에서 야생동물들과 함께하는 포토월, 인생네컷 부스를 운영했는데요. 야생에 대한 다양한 글귀가 담긴 피켓을 들고, 많은 참석자 분들이 화기애애하게 분위기를 녹여주셨어요.
이번 그린컨퍼런스에서는 오랫동안 ‘야생’ 현장에서 고민을 이어오신 지리학자 공우석님, 식물분류학자 허태임님, 녹색연합 활동가 서재철님, 동물원 수의사 김정호님, 변호사 정혜진님, 그리고 예술가로서 사회적 연결을 모색해온 음악가 하림님을 모셨습니다. 이제 이분들의 이야기를 함께 들어보도록 할까요?
야생, 살아있다
첫 강연자이신 지리학자 공우석님은 오랫동안 극지 고산식물들을 연구해오셨어요. 이번 강의에서는 기후위기가 불거지면서 가장 먼저 고산생태계 식물들이 멸종위기에 처해 있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당장 작은 야생 식물의 멸종이 큰 영향을 미치지는 없겠지만, 생물다양성에 연쇄작용을 일으켜 인류를 포함한 생태계 전체에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뼈 아팠습니다. 강연자는 무엇보다 원격상관tele-connection과 연결nexus에 대한 고민을 강조하셨는데요. 이것은 바로 내가 매일 아침 마시는 커피, 추워서 입는 캐시미어 옷이 지구 반대편에서 어떤 파괴를 낳는지 고민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누구나 사회와 세상이 변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지구 오염의 문제는 바로 나로부터 시작한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이라고요. 또한 유명한 산을 점령하듯 오르는 게 아니라, 우리 주변에서 생명체의 ‘살아있음’을 천천히 관찰해보길 요청하셨어요.
야생, 경이롭다
두 번째로 강연해주신 분은 식물 분류학자 허태임님이었습니다. 사회자는 “팽나무에 대한 짝사랑이 깊어진 사람, 식물을 사랑하고 지키고 싶은 마음으로 기록하는 학자”라고 소개를 해주셨는데, 정말 그 말처럼 식물에 대해 이야기하실 때마다 청중석으로 벅차오름이 전달되는 듯했습니다. 강연자는 어린 시절 또래 친구가 드물었던 시골에서 팽나무는 유일한 친구였고, 그 앞에서 글을 쓰거나 힘들 때 소원을 빌었다고 합니다. 이후에 연구자가 되어서는 팽나무의 전 생애를 관찰하며 ‘경이로움’을 느꼈다고 하셨는데, 그것은 허태임이라는 호모사피엔스가 동등한 지구 공동체 일원인 팽나무를 만나는 과정이라고 말씀해주셨어요.
“팽나무는 복숭아처럼 과육질이고 그 안에 내과피가 있는데, 이게 보통 식물과 달리 아라고나이트라는 달팽이 껍질과 같은 성분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씨앗이 그 내부에서 식물로 발아해 뚫고 나오는 거죠. 팽나무 속 식물이 종족번식을 위해 취하게 된 전략입니다. 이런 과정들을 살피면 인간이라는 게 뭘까 싶어요. 각각의 종들이 가진 복잡한 생장을 이해하면 지구상의 동등한 종으로 식물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야생, 지키다
이어서 25년간 녹색연합 활동가로 일해온 서재철님은 야생에 귀 기울이며 현장을 ‘지키는’ 게 활동가의 일이라고 강조해주셨어요. 그래서였을까요? 지난 10년간 백두대간, 한라산, 지리산에서 구상나무가 집단 고사해온 과정을 들으며 현장의 생생함이 느껴졌습니다. 또한 강연자는 팬데믹으로 인류를 위협했던 코로나-19를 언급하며, 인간이 야생동물의 서식지를 침범한 것에 근본적 원인이 있다고 지적하셨어요. 앞으로 계속 비슷한 행위를 할 경우 인간에게 직접적인 위협이 된다는 걸 깨달아야 한다고요. 한편 여기에 대응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궁금증이 들었는데요. 녹색연합 활동을 통한 백두대간, DMZ 철책선 뒤 민북지역 7만 헥타르, 경북 영양·울진에 걸친 왕피천 유역 2만 헥타르의 보호구역 지정 성과를 듣고나서, 막연히 야생을 보호해야겠다는 구호에서 벗어나, 제도적으로 어떻게 야생을 지키는 활동에 동참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야생, 다양하다
다음으로 가수 하림님은 야생처럼 다양한 결을 가진 음악을 들려주셨어요. 앞선 강연들을 듣고난 뒤라 그런지 불러주신 ‘숲속 블루스’의 가사 중 “나무 나무/나무가 좋아요/그대도 나를 좋아했으면”이 특별하게 다가왔던 것 같아요. 나무를 단순한 사물로 대상화하는 것이 아닌, 나를 사랑할 수도,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는 동일한 주체로 보는 관점이 그랬어요. 이것은 지리학자 공우석님이 ‘나’의 일상과 저 멀리 극지 고산식물의 위기를 ‘연결’로 바라보며 책임을 갖는 것, 식물분류학자 허태임님이 팽나무를 사랑하고 지키고 싶은 마음에서 기록하는 것, 그리고 서재철님이 10여년 간 백두대간, 한라산, 지리산에서 구상나무의 고통을 하나하나 살피는 것과 멀지 않게 느껴졌어요. 그 다양한 내용들이 하림님의 노래를 통해 다시 한 번 조율되는 소중한 시간으로 다가왔습니다. 아울러 “음악은 쓰레기조차 남기지” 않으며, “소리가 나면 존재하고, 끝나면 사라”지지만, 부수적으로 생겨나는 각종 굿즈, 쓰레기, 음악을 영구히 소장하기 위한 저장장치, 무절제하게 소모되는 전기에 대한 하림님의 고민 역시 느껴볼 수 있었어요.
야생, 잇다
“동물원에 왔다고 동물을 맨날 볼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동물이 나오고 싶을 때 나온다면 그때 운좋게 볼 수 있는 겁니다.”
이 말에 다음 강연자이신 청주동물원 김정호 수의사님의 가치관이 잘 드러나 있다고 생각했어요. 2018년 대전동물원에 탈출한 퓨마 ‘뾰롱이’의 죽음, 2023년 3월 어린이대공원을 탈출한 얼룩말 ‘세로’의 소식이 알려지면서 동물원은 여론에 뭇매를 맞았습니다. 이때 야생은 동물원과 대비되는,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는 탈출구로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간단치 않은데요. 이제 전 세계적으로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은 거의 없으며, 동물원에서 태어난 동물들에게 돌아가야할 곳이 어딘지 불명확한 물음으로 남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해 강연자는 야생과 동물원의 이분법을 넘어, 아픈 동물이나 멸종위기 야생동물을 보호하는 공간으로서 동물원의 대안적 역할과 고민을 나눠주셨어요. 예컨대 동물을 일방적으로 내몰아 구경거리로 만드는 게 아니라, 동물 구조와 환경개선, 자연방사 같은 동물원의 일을 공개해 동물원-야생의 관계를 고민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죠. 청주동물원은 팀 단위로 운영되는 작은 곳이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동물들을 위한 의사결정을 신속하게 결정해올 수 있었다고 말씀해주셨어요.
야생, 옹호하다
마지막으로 정혜진 변호사님의 강의를 통해서는 지구공동체 구성원으로서 야생을 ‘옹호’하는 지구법의 가치를 생각해볼 수 있었습니다. 지구법은 헌법, 민법처럼 명확한 법률 조항이 있는 게 아니라, 법과 제도에 대한 가치관을 말하는데, 이것은 “모든 동·식물과 함께 살아가는 걸 전제로하며, 인간 위주가 아닌 지구공동체의 공존을 중심으로” 삼고 있습니다. 실제 지구법에 대한 고민이 구체적인 변화로 이어진 경우도 있는데요. 2008년 세계 최초로 ‘자연의 권리’를 헌법에 명문한 에콰도르, 황거누이 강의 법인격성을 인정한 뉴질랜드 등의 사례가 그렇습니다. 한국에서는 2003년 천성산 도롱뇽, 2018년 설악산 산양 28마리를 원고로 내세운 적 있지만, 원고 부적격 사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말씀해주셨어요. 느린 현실 변화가 안타까웠지만, 이제 상식이 된 노예해방과 여성인권 역시 과거에는 받아들일 수 없던 권리였음을 떠올리며, 어떻게 지구법의 가치와 ‘자연의 권리’를 운동의 동력으로 삼을지 고민되었던 시간이었어요.
강연이 모두 끝난 뒤에는 강연자들과 청중의 토크 시간이 마련됐어요. 분위기가 무르익을 무렵 동물그림작가 일을 하시는 시민분께서 질문해주셨는데요. “같은 개구리라도 멸종위기종으로 지정된 수원청개구리는 여론의 관심을 받지만, 터전에서 내몰린 노랑배청개구리는 조명 밖에” 있는 격차를 어떻게 메울 수 있는지에 관한 물음이셨어요. 여기에 변호사 정혜진님은 우리 사회에서 동물권에 대한 관심, 반려동물 문화가 확산되고 있는데, 바로 여기서부터 실험실 동물, 야생동물들의 고통까지 공감하는 마음이 시작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씀해주셨어요. 이것은 앞선 강연에서 허태임님이 반려식물, 정원문화의 유행을 언급하며, 식물을 애지중지하는 마음들이 기후위기 속에서 힘들게 보내는 야생식물에까지 닿길 바란다고 하셨던 것과 이어지는 듯했습니다.
흐린 날씨에도 많은 분들이 찾아주셔서 <2023 그린컨퍼런스 – 야생하다>를 잘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연사분들께서 야생에 대해 정의하셨던 ‘살아있다’, ‘경이롭다’, ‘지키다’, ‘다양하다’, ‘잇다’, ‘옹호하다’가 잘 전달되셨나요? 저는 강연을 들으면서 ‘어우러지다’라는 야생과 저만의 연결고리를 생각해봤어요. 막연해서 알 수 없었고, 미디어를 통해서만 접해왔던 야생의 이미지가 그린컨퍼런스의 어우러짐을 통해 넓어지고 깊어지는 걸 느꼈거든요. 참석해주셨던 모든 분들이 각자의 ‘야생’에 대해 고민해볼 수 있는 시간이 되셨길 바라며,
앞으로 더 많은 분들과 ‘야생’의 가치를 나눌 수 있는 녹색연합으로 다가갈게요!
2023 그린컨퍼런스 : 야생하다
기획한 활동가: 황일수, 이다솜, 박은정, 신지선, 김진아
함께 한 기획사: 솔깃 커뮤니케이션즈
후원해주신 곳: 브라이언임팩트재단, 파타고니아
기록_그린프로젝트팀 박상욱 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