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녹색장독대 : 우수와 경칩사이, 우리의 첫 번째 걸음

2026.03.03 | 기후위기, 행사/교육/공지

안녕하세요.
이 글을 읽고 계신 당신은 어떤 계절을 지나고 있나요.
달력은 분명 봄이라 말하지만, 바람은 아직 차갑고, 아침 공기는 겨울의 결을 남겨두고 있지는 않나요.

2월 28일은 우수와 경칩 사이, 올해 중 가장 따뜻했던 그날, 녹색연합 호두나무집 앞마당에 스무 명의 시민이 모였습니다. ‘녹색장독대’라는 이름으로, 절기의 흐름을 몸으로 느끼고 그 흐름에 맞추어 장을 담그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모임은 총 세 번의 절기를 함께 지나는 자리입니다. 그 첫날, 각기 다른 지역에서 서로 다른 나이로 살아온 사람들이 이날만큼은 같은 속도로 걷기 위해 모였습니다. 우리는 채비를 하고 녹색연합을 둘러싸고 있는 성곽길에 올랐습니다.

절기를 걷다|생태산책
박새가 가장 예쁘게 우는 계절입니다. 까치는 우리를 경계하듯 울고, 바람은 마른 나뭇잎을 바스락거리게 합니다. 발밑에서 부서지는 소리는 지난 겨울이 완전히 물러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우수 무렵의 숲은 비가 오지 않아도 젖어 있습니다. 얼어 있던 땅속의 물이 녹기 때문입니다. 경칩이 가까워지면 소리는 달라집니다. 곤충이 깨어난다는 절기의 이름처럼 숲의 숨결도 조금씩 바뀝니다. 우리는 나무에 귀를 대었습니다. 3월까지는 나무에 귀를 기울이면 물을 끌어올리는 소리가 들린다고 합니다. 또렷이 들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귀를 대고 있는 동안 분명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살고자 다시 움직이는 기운을요. 아직 잎은 없지만 겨울눈은 단단히 여물어 있고, 햇볕을 머금은 수피는 인간의 피부처럼 따뜻합니다. ‘절기(節氣)’는 계절이 아닌 기운이라 하더군요. 그리고 기운은 드러나기 전에 이미 시작됩니다. 그 흐름을 가장 정직하게 따르는 음식이 있지요. 바로 장입니다.

시간을 담다|장담그기
성곽길에서 봄의 기운을 느끼고 내려온 우리는 사무실 앞마당에 모였습니다. 그리고 빈 항아리를 열고 장을 담그기 시작했습니다. 다음 절기를 함께 맞이하기로 약속한 셈이죠. 겨울 초입, 김장을 마친 뒤 우리의 선조들은 메주를 빚었습니다. 그리고 콩을 삶아 찧어 벽돌 모양으로 빚고, 볏짚으로 묶어 따뜻한 곳에 매달았지요. 초기에는 곰팡이가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온기를 주고, 이후 차가워지는 날씨는 잡균을 줄여 발효가 안정적으로 이어지게 합니다. 그렇게 90일에서 100일 동안 메주는 겨울을 통과합니다. 차가운 공기는 발효를 서두르지 않게 하고, 콩은 조급하지 않게 시간을 견딥니다. 그리고 정월 무렵, 입춘이 지나 기온이 서서히 오르기 시작하면 우리는 장을 담급니다. 깨끗이 씻은 항아리에 소금물을 붓고 메주를 넣습니다. 숯과 고추를 올린 뒤 항아리는 햇볕과 바람 속에 놓입니다. 항아리는 그 순간 또 하나의 생태계가 됩니다. 수천 종의 미생물이 콩 단백질을 분해하고 구수한 향을 만들어내지요.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 안은 복잡한 변화가 쉼 없이 이어집니다. 봄이 되어 나무가 수액을 밀어 올리듯 장도 그렇게 깨어납니다. 물이 오르는 절기에 장을 담그는 이유도 아마 그 흐름을 따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장 담그는 그날, 저는 경북 봉화에서 백태 농사를 지으시고 직접 메주를 띄워 장을 담그셨던 제 할머니를 떠올렸어요. 어릴 적 저는 할머니께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할머니, 장은 언제 열어?”
“진달래 피면.”

그때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잘 몰랐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정말 많은 사람들이 “진달래가 피면 장을 가른다.”라고 말하더군요. 달력을 보지 않아도 산의 색을 보면 알 수 있었던 때. 기온이 안정되고 항아리를 열어도 괜찮은 시기. 진달래는 시간을 말하는 것이었어요. 절기는 날짜가 아니라 기운이라고 했지요. 진달래 필 무렵이라는 말도 어쩌면 그 기운을 읽는 방식이었을 것입니다.

봄 기운이 완연해지고 산에 진달래가 피기 시작하면 우리도 장을 가릅니다. 장은 자연의 흐름을 따라야만 제 맛을 내는 음식입니다. 계절이 제자리를 잃으면 항아리 속 숨결도 달라집니다. 장을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날씨를 보게 되고, 바람의 방향을 느끼게 되고, 햇볕의 각도를 살피게 됩니다. 자연을 ‘이해’하는 것이 아닌 자연과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되겠지요.

감각을 되찾다|기후위기
기후위기를 이야기할 때 우리는 숫자를 먼저 떠올립니다. 몇 도 상승, 몇 퍼센트 감소, 몇 년 안의 전환… 하지만 장을 담그고 돌아보니 그 숫자들이 다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요즘 계절은 왜 이렇게 어긋나는지, 꽃은 왜 제때 피지 않는지, 우리는 왜 자꾸 자연보다 빠르게 서두르는지. 어쩌면 기후위기는 어떤 수치가 아니라 계절을 읽는 감각을 잃어가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녹색장독대는 절기를 함께 나누며 자연의 흐름을 몸으로 다시 느껴보는 자리이기를 바랍니다. 기후위기라는 말이 멀게 느껴질 때, 그것을 가까이 가져오는 시작은 아주 작은 감각일지도 모르니까요. 박새가 가장 예쁘게 우는 소리를 알아차리는 일, 까치가 낯선 이를 구분해 내는 울음에 귀 기울이는 일, 나무가 물을 끌어올리는 봄의 기운을 느끼는 일, 그리고 장독이 조용히 숨 쉬는 시간을 기다리는 일. 그 작은 감각을 함께하고 싶습니다.

며칠 전 담근 장은 이제 항아리 속에서 봄을 건너고 있습니다. 곡우와 입하 사이, 우리는 다시 만나 그 시간을 열어보게 되겠지요. 매 순간의 절기의 기운이 당신에게도 닿기를 바랍니다.

기록이음팀 배채은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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