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 성찰과 친교와 순례의 시간

2018.09.23 | 행사/교육/공지

걷는 것을 무척 좋아하고 즐깁니다. 본격적인 걷기는 산책으로 시작되었습니다. 1996년, 비교적 늦은 나이에 시작한 미국 동부의 유학생활은 그리 녹녹치 않았습니다. 천주교 수도회의 공동체에서 살았기 때문에 먹고 사는 건 문제가 없었지만, 공동체 자체에서 오는 어려움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공동체엔 모두 8명이 살았는데, 저 말고는 모두 미국인이었습니다. 언어와 관습 차이에서 오는 어려움이 클 수밖에 없었습니다. 공부도 쉽지 않았습니다. 잘 듣지 못하고 편히 말하지 못하는 강의 시간이 특히 힘들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공동체에 있는 것 자체도 스트레스가 되었습니다. 내 삶의 자리가 스트레스가 되니 참 당혹스럽고 서글프기까지 했습니다. 밖으로 나갔고, 나가니 걷게 되었습니다. 제 삶 속에서 걷기가 크게 다가온 계기입니다.

제가 살았던 보스턴 근처의 ‘케임브리지’는 아담하고 아름다운 도시입니다. 밤에도 걸을 수 있을 만큼 안전했습니다. 대개 저녁 식사 후 1시간 정도, 거의 매일 산책을 나갔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걸으면서 어지럽게 떠돌던 생각들이 갈무리 되고, 어려움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마음을 다지면 막연한 불안도 사라지며, 집에 돌아올 때면 마음이 홀가분해졌습니다. 그렇게, 걷기는 삶을 성찰하고 단단하게 만드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걷기의 체험은 학위논문을 쓰느라 3년 남짓 시간을 보냈던 로마에서도 그대로 이어졌습니다. 과장이 아니라, 논문의 절반 이상은 길과 공원에서 썼습니다. 전체적인 구상을 길에서 했고, 걸으면서 글을 쓰다 막힌 곳을 뚫고 나갔고, 걷다가 새로운 생각을 얻었으니 말입니다. 몸을 움직이며 걷는 것이 창조적 사색을 자극한다는 것을 실제로 체험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요즘도 글이 잘 써지지 않거나 생각이 막히면 책상을 떠나 밖으로 나가 걷습니다. 이렇게 걷기는 새로움 속으로 들어가는 문이 되었습니다. 일상에서는 아무래도 자신이 사는 곳을 중심으로 반복해서 걷게 됩니다. 그렇게 반복해서 걷다 보면 걷는 곳의 여기저기를 기억하게 되고, 그 곳들이 점점 친근하고 정겹게 느껴집니다. 걸으면서 이 곳과 저 곳을 지나치는 단계를 지나면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일종의 사귐과 친교가 생겨납니다. 케임브리지에는 거리와 집집마다 나무와 꽃이 많았고, 그래서인지 봄과 가을이 무척 아름다웠습니다. 몇 년간 산책을 계속하니 이 집의 꽃과 저 골목의 나무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냥 꽃과 나무가 아니라, 여기 ‘사는’ 꽃, 저기 ‘사는’ 나무가 되었습니다. 걷다가 이 꽃이 보이고 저 나무가 보이면 반가움을 느끼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케임브리지에서 그리 멀지 않은 ‘콩코드’라는 곳에 ‘월든’ 호수가 있습니다. ‘월든’은 쏘로(Henry David Thoreau)가 젊은 시절오두막을짓고2년동안홀로살았던 곳입니다, “삶의 본질적인 것들”이 무엇인지를 알고자 걷는데 40분가량 걸리는 아담하고 아름다운 이 호숫가를 적어도 매달 한번은 걸었습니다. 언제부턴가 나무와 자그만 언덕과 기찻길 등 ‘월든’의 이 곳 저 곳이 정겹게 다가왔습니다. 로마의 골목길도 걷기를 무척 즐겼던 곳입니다. 이전에 살았던 케임브리지나 자주 찾았던 월든과는 무척 다른 분위기였지만, 걷다보니 어느새 로마의 골목길이 주는 매력에 푹 빠지고 정이 무척 들었습니다. 사실 이런 일은 어디서나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걷는 것 자체를 목적으로 걷노라면, 내가 사는 동네의 이 곳 저 곳이 눈에 띄고 낯이 익고 정답게 느껴집니다. 걷기를 통해서 이 곳, 저 곳과 관계가 생겨납니다. 이렇게 생겨난 관계 속에서 이제 ‘그 곳’은 내가 걷는 물리적 장소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부버(Martin Buber)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곳은 이제 ‘나와 그것’의 관계를 넘어, 내게 다른 곳으로는 대체할 수 없는 고유한 상대, ‘너’가 됩니다. 그곳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가끔씩 마음먹고 먼 길을 걸을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길을 나서면, 일상에서 벗어나 세상 한 가운데서 ‘나’를 새롭게 바라보게 됩니다. 세상을 바라보고 세상과 소통합니다. 같은 길이라도 차로 갈 때와는 전혀 다른 일이 일어납니다. 삶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하게 됩니다. 세상 속에서 내 존재의 의미와 역할을 생각하게 됩니다. 어떻게 살아왔는지 뒤돌아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합니다. 내게만 쏟았던 관심을 밖으로 돌리게 됩니다. 다른 사람과 자연을 바라봅니다. 정신없이 휩쓸려 왔던 세상의 거센 흐름에서 벗어나서 스스로 물어봅니다, 무엇이 좋은 삶인지 아름다운 삶인지 묻고, 혼자만이 아니라 함께 사는 것에 대해 고민합니다. 이렇게 나는 삶의 근본을 향해 걸어 들어갑니다. 그렇게, 걷기는 순례가 됩니다. 물론 순례를 위해 꼭 먼 길을 떠날 필요는 없습니다. 일상의 산책에서도 마음을 모아 바라보면, 자신과 주위를 새롭게 볼 수 있고 만들 수 있습니다.
걸으면서, 삶을 바라보고 새로움을 맛보게 됩니다. 무심히 지나치고 말던 내 주변에 더 가깝게 다가가 정을 느낍니다. 참된 ‘나’와 좋은 삶을 찾아 나서게 됩니다. 그래서 걷기는 선물이며 초대입니다.

무엇보다, 축복입니다.

 

글: 조현철
조현철 님은 천주교 신부(예수회)로 현재 서강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가르치면서 녹색연합 상임대표, (사)꿀잠(비정규노동자의집)대표, JPIC(정의·평화·창조보전)양성학교 교장으로 있다. 사회 현실에 대한 관심과 참여, 신학적 성찰을 중요하게 여기면서 활동하고 있다.

 

이 글은 녹색희망 266호에 실린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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