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는 하나의 명상이며, 땅에 닿아있는 느낌을 품고 느리게 걸어가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는 많은 메시지가 담긴다. 마르틴 루터 킹이, 간디가 그랬듯이, 비노바 바베가 그랬듯이 말이다. 그들은 걸었고, 그 걸음은 하나의 정치적 메시지가 되었다. 영성과 정치는 함께 걷는 것이다.”
2004년 한국을 방문한 인도 출신 생태운동가이자 영국 슈마허 컬리지의 교수 ‘사티쉬쿠마르’가 성북동 녹색연합 사무실을 찾았다. 해마다 십여 일을 걷는 ‘녹색순례’를 하는 녹색연합의 활동가들에게 그는 다시금 걷기에 대해 말했다. 그는 과거 60년대에 구소련의 핵무기개발을 반대하며 인도에서 유럽과 러시아를 거쳐 미국까지 2년 8개월을 걸어갔다. 그의 평화순례는 98년 녹색연합이 함께 걷는 ‘녹색순례’를 시작하게 된 영감이 되었다.
1998년 어느 날, 누군가가 순례를 제안했다. 함께 걸으며 이 땅 곳곳의 아름다움과 아픔을 직접 겪자고. 바쁘게 돌아가는 여러 일들을 내려두고 모두가 길을 떠나는 게 가능할까? 하는 걱정을 안고 출발한 첫 순례. 그해 4월 22일 지구의 날 우리는 강화에서 새만금 갯벌까지 서해안 갯벌을 따라 걷는 ‘녹색순례’를 시작했다. 새만금간척사업이 논란이 되던 때였고 한편으론 아직은 ‘천혜의 갯벌’이 남아있던 때였다. 강화에서 새만금까지 8박9일 첫 순례를 마친 그해 이후 이제 녹색연합에게 순례는 역사가 되었다.
1999년에는 경기 강원 일대의 765kv 송전선로 건설 예정지, 2000년 해남에서 새만금까지, 2001년 DMZ 철책을 따라, 2002년 미군기지 지역, 2003년 낙동강 1300리, 2004년 덕유산부터 지리산까지 백두대간, 2005년 천성산, 2006년 지리산 둘레길, 2007년 제주도, 2008년 경부운하 건설예정지, 2009년 울진 왕피천, 2010년 무주-진안-장수 마을길, 2011년 남도길, 2012년 강원도의 환경분쟁현장, 2013년 철원부터 백령도까지 2014년 새만금, 금강, 섬진강 2015년 가리왕산과 설악산까지. 2016년 케이블카 건설 논란을 빚은 설악산, 2017년 미군기지가 있는 오키나와 그리고 올해는 4.3 70주년을 맞은 제주도를 십년 만에 다시 찾았다.
녹색순례 장소는 해마다 녹색연합 전국 워크샵에서 투표로 결정된다. 한창 환경문제로 분쟁이 빚어지는 지역을 선택할 때도 있고 개발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한 곳으로 앞으로도 꼭 보존해야 하는 곳을 선택할 때도 있다. 처음부터 끝가지 걷기에만 집중하기도 하고 우리가 이 길을 왜 걷는지 알리는 캠페인을 하기도 하고 분쟁이 있는 지역에선 대책회의를 꾸려 함께 시위를 준비하기도 하고 때론 마을 주민들과 흥겨운 잔치를 벌이기도 한다. 단 한번도 똑같은 모습의 순례는 없다. 그러나 순례 첫 해인 98년에 세웠던 순례의 원칙들 대개는 21년 동안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다. 그 중 첫 번째 원칙이 녹색순례는 ‘걷는 순례’이며 하루 8시간을 걷는다는 것이다. 왜 걸어야 하는지를 ‘두 다리로 걸으며 자연의 경이로움과 파괴의 아픔을 온몸으로 느끼며 살아있는 환경운동을 준비한다’ 는 비장한 문장으로 설명하고 있다. 정말 그랬다. 걸어야만 알 수 있는 것, 느낄 수 있는 것, 몸으로 체화되는 것, 머리는 기억하지 않아도 소리와 색과 냄새로 기억할 수 있다는 것을 녹색순례를 통해 우리는 배웠다.
“가자 천리 길 굽이굽이 쳐 가자, 흙 먼지 모두 마시면서 내 땅에 내가 간다”
어느덧 녹색순례가(歌)가 되어버린 김민기 님의 노래 ‘천리길’을 부르며 우리는 환경분쟁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마을들을 찾아가는 길을 떠난 적도 있고 너무나도 아름다워 발을 딛는 것조차 조심스러운 귀한 자연을 만나기도 했었다. 강을 따라 걷고 뻘밭에 쑥쑥 빠지며 걷고 산길을 헤매며 오르내리고 몇날며칠 순례단을 빼고는 사람을 만날 수도 없는 곳을 걷기도 했고 시장 한복판을 지나며 사람들을 만나고 차들이 쌩쌩 달리는 아스팔트를 따라 걷기도 했다. 분명 우리 땅이지만 들어갈 수 없었던 담벼락을 따라 걷기도 했고 철책 너머의 땅을 그저 눈으로만 쫓으며 군인들의 보초를 받으며 걷기도 했다. 우리가 걸은 곳 모두 희망과 절망, 분노와 흥겨움, 기쁨과 슬픔을 간직한 우리 땅의 날것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우리는 순례를 통해 신음하는 자연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고, 상처난 곳을 치유하기 위해 고민하고 또 행동했다. 또 순례에서 만난 이 땅의 경이로움과 아름다움은 절망하고 포기하려는 우리를 일으켜 세우는 힘이기도 했다.
사랑할 때, 그 자체를 온전하게 경험하지 않고 어떻게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녹색순례는 이 땅을 사랑하기 위해, 이 땅을 지키기 위해 알아야 할 가장 근원의 무언가를 몸으로 알게 해 준다. 발이 부르트고 발바닥의 물집이 터지고 다리가 저려오는 순례길을 누군가는 고행의 길이라고 하고, 생각을 내려놓고 마음마저 비울 수 있는 순례길을 누군가는 성찰의 길이라고 한다. 또 그 길에서 환경운동가의 길을 걷고 있는 나를 만나기도 한다. 함께 걷고 함께 밥해먹고 함께 잠자며 서로 다른 색을 지닌 이들이 녹색과 어울려졌을 때 어떻게 빛나는지를 겪기도 한다.
그래서 해마다 녹색연합은 새로운 순례를 떠난다. 걷고 걷는다. 걸어야만 우리가 환경운동을 하는 이유를, 방법을, 가치를 가장 정확하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녹색순례로 걸어온 길
[제 1회] 1998년 ‘생명과 조화의 땅 갯벌을 살리자, 강화도 갯벌에서 새만금까지’ → 강화도 남단갯벌, 시화호방조제, 남양만, 아산만, 서산AB 지구, 남포방조제, 부안 계화지구, 새만금 사업지구
[제 2회] 1999년 ‘송전탑과 핵발전소, 환경파괴 현장을 가다’ → 신가평 ~ 신태백 765kV 송전선로 공사지역, 울진/ 고리핵발전소·신규부지, 대전 에너지기술연구소 에너지초절약빌딩
[제 3회] 2000년 ‘지구를 위해, 갯벌을 위해, 땅 끝에서 새만금까지’ → 영산강 3단계 간척공사 지역, 영산강 하구 갯벌 지역(목포, 무안, 함평 등), 영산강 4단계 간척사업 백지화 지역, 새만금 간척사업 지역, 김제 신공항 건설 지역
[제 4회] 2001년 ‘생명과 평화의 DMZ’ → DMZ 일원 : 파주, 연천, 철원, 화천, 양구, 고성, 인제
[제 5회] 2002년 ‘빼앗긴 들에 생명의 씨앗을, 미군기지를 가다’ → 경기 권역 및 군산 일대 주요 미군기지 일대 : 매향리, 평택, 파주, 동두천, 의정부, 용산, 군산
[제 6회] 2003년 ‘낙동강, 생명의 물줄기를 따라서’ → 태백 황지, 봉화, 예천, 상주, 구미, 달성습지, 창녕, 낙동강 하구둑, 부산 을숙도
[제 7회] 2004년 ‘백두대간, 공존을 꿈꾸다’ → 태백산 일대, 태백/정선 폐광지역, 고랭지 채소밭 경작지역, 자병산 석회석 광산 개발지역, 삽당령, 도암댐, 오대산 국립공원, 아침가리골, 점봉산
[제 8회] 2005년 ‘천성산, 생명의 속도로 가라’ → 천성산 일대(경부고속철도 천성산 구간, 내원사, 무제치늪, 화엄늪), 낙동강 하구
[제 9회] 2006년 ‘지리산, 길에서 길을 묻다’ → 노치, 심원, 성삼재 길, 지리산 개발 현장, 섬진강 19번 국도, 반달가슴곰 복원현장(종복원센터)
[제 10회] 2007년 ‘제주도, 강방왕 고라줍서’ → 제주항, 삼양해수욕장, 함덕, 선흘곶자왈, 종달리 철새도래지, 성산 일출봉, 물찻오름, 난대림연구소, 돈내코, 화순 해군기지 예정지, 산방산, 송악산
[제 11회] 2008년 ‘경부운하 반대, 그대로 흐르게 하라’ → 부산, 양산, 밀양, 창녕, 달성, 상주, 문경, 충주, 여주, 팔당
[제 12회] 2009년 ‘울진, 생명의 품에 들다’ → 왕피천, 보부상 옛길, 화전민터, 왕피리 방주공동체, 폐광지역, 용소골 등
[제 13회] 2010년 ‘무진장, 경계를 넘나들다’ → 무주, 진안, 장수
[제 14회] 2011년 ‘너의 길을 만들어라’ → 전라남도 영암 월출산, 강진 일대, 해남 일대, 청산도
[제 15회] 2012년 ‘자연의 봄. 나를 보고, 당신을 봅니다’ → 금강산 건봉사- 해상리, 오호리, 청간리, 낙산사, 남대천, 구정리, 삼척 맹방 해안림
[제 16회] 2013년 ‘너와 나 사이의 비무장지대’→ 강원도 철원 – 연천 임진강 일대 – 인천 대청도, 백령도
[제 17회] 2014년 ‘강이 바라는 바다, 강이 그리는 바다 강강순례’ → 금강하구둑, 새만금, 섬진강, 남해
[제 18회] 2015년 ‘좋아서 걷는 순례’ → 강원도 오색리- 대청봉/ 두타산- 가리왕산
[제 19회] 2016년 ‘그렇게 모두 설악이 된다’ → 설악동 야영장, 토왕성폭포, 오색마을, 장수대, 미시령옛길, 속초
[제 20회] 2017년 ‘오키나와 평화나와’ → 오키나와 평화기념공원, 기노완 후텐마기지, 사키마 미술관, 북부 다카에 숲길, 헤노코, 기노자촌, 캠프 한센, 요미탄 태평양전쟁, 강제징용 흔적지, 가데나기지
[제 21회] 2018년 ‘동백꽃, 다시 피다’ → 4.3평화공원, 절물오름, 사려니숲길, 이덕구 산전, 거문오름, 선흘 동백동산, 서우봉 진지동굴, 북촌 너븐숭이, 성산 진지동굴, 제2공항 예정지, 서귀포 4.3유적지, 제주 해군기지, 돈내코, 윗세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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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정명희(녹색연합 협동사무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