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너 스프링스(Warnner Springs)로 향하는 길. 넓게 드리워진 초원을 가로지르는 트레일 위에 홀로 선 하이커의 모습이 전혀 쓸쓸해 보이지 않았다.
걷는다는 것
인간의 DNA 속에 오랜 시간 녹아져 있는 생존본능. 인간은 골반뼈가 발달하고 직립보행을 하게 되면서 뇌 용량이 커지고 손이 발달하게 되었다. 특히, 손이 자유로와지면서 인간이 다른 유인원에 비해 탁월한 진화를 하게 되었다. 진화에 진화를 거듭해 오늘날 우리는 태어나고 자라면서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자연스레 걸을 수 있게 되었고, 이제는 생존을 위한 걸음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위한 걸음을 걷게 되었다. 오늘날 수많은 이들이 각자의 연유로 배낭여행이나 도보여행을 떠나고, 또는 극한의 여정을 감수하기도 한다. 과연 무엇이 이들을 그 길로 안내하는 것일까? 추측건대 그 이유는 매우 다양할 것이다. 무언가 그 길에서 얻기를 희망하거나 잠시 힘든 세상을 등지고 싶어서, 아니면 잠시나마 흔한 일상에서 벗어나 일탈을 즐기고자 여행을 떠날 수도 있고 또는 정말 아무 이유 없이 그냥 나서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내가 4,300km라는 머나먼 여정을 선택한 이유도 아주 단순했다. 단순했다고는 하지만 나에게만큼은 특별하기도 했다. 내가 그토록 바라던 꿈이었기 때문이다.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Pacific Crest Trail, PCT)
미국 서부의 멕시코 국경에서 캐나다 국경까지 이르는 4,300km를 종단하는 미국 3대 장거리 트레일 중 하나이자, 미국인들이 가장 걷고 싶어 하는 트레일이기도 하다. 완주까지 약 4개월~5개월이 소요되고, 오직 스스로의 힘으로 숙영 및 취사도구를 이용하여 걸어서 진행해야만 하는 극한의 도보여행이다. 시에라 네바다, 캐스케이드 산군 등을 거쳐 캘리포니아, 오리건, 워싱턴 3개의 주를 가로지르는 트레일이며, 이 트레일의 구간 중 가장 높은 지점은 시에라 구간의 포레스트 패스(Forester Pass. 4,009m)이다. 전구간을 통해 25개의 국유림과 7개의 국립공원을 통과하게 되고, 요세미티 구간에서는 많은 구간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존 뮤어 트레일 (John Muir Trail, JMT_338.6km)과 겹치게 된다. 사람이 살지 않는 사막과 산악지역을 지나야하기 때문에 지형, 날씨, 사막에서의 식수 부족 등 환경에서 오는 어려움은 물론, 곰이나 퓨마, 방울뱀 등의 야생동물의 위협에도 노출되어있어 어려움이 크다.
PCT를 걸으며
가장 고생했던 것은 처음 시작했을 때, 사막구간에서이다. 대부분의 하이커가 PCT에 적응하기도 전에 뜨거운 태양과 부족한 물로 사투를 벌여야 하는 어렵고 힘든 지역이다. 날씨가 더운 만큼 땀도 많이 흘려 마시는 물의 양도 어마어마 했다. 많게는 6-7리터의 물을 짊어지고 걸어야 한다. 트레일 환경에 적응을 하기도 전,이전의 경험이 불러온 자만심이 독이 되기도 했다. 하루에 못해도 30KM를 걸어야지 생각했었고 그것을 지키려 했던 것이 화를 부른 것이다. 욕심으로 인해 무거워진 배낭의 무게가 고스란히 내 무릎으로 전해져 트레일 초반 무릎 통증으로 고생을 했다. 그로 인해 트레일을 중단하고 마을로 내려가야 했고, 한국에서도 가본적 없는 한의원을 미국에서 갔었다. 힘든 시기였지만, 그런 경험을 통해 자신을 되돌아보고 마음의 여유를 갖고 일주일을 쉬자 몸이 회복되었다. 다시 걸을 수 있었다. 길을 잘 못 들어 꼬박 한 시간을 되돌아가기도 했고, 식량을 얻기 위해 왕복 20KM를 걸어갔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되돌아 왔던 일도 있었다. 보급품 일정이 맞지 않아 무작정 기다리기도 했고, 건조식량과 초코바로 끼니를 때우다 남들따라 토르티아와 참치를 시도했다 도저히 먹지 못하고 다시 육포 몇 조각에 기대야만 하기도 했다.
수일째 비를 맞으며 젖은 신발로 걷고 젖은 텐트에서 잠을 잤고, 폭우가 쏟아지고 천둥번개가 내리치는 악몽 같은 밤을 보내기도 했다. 트레일을 함께 걷던 가족을 보며 아버지와 함께 한 시간들이 떠오르기도 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었던 5개월동안 동고동락했던 친구들, 도움을 주신 분들의 고마움 역시 빼놓을 수 없는 기억이다.
이 길의 특징으로 트레일 엔젤과 트레일 매직을 꼽을 수 있다. 트레일엔젤은 하이커들을 위해 자신의 집을 개방해 숙식을 제공해주시는 사람들이다. 숙식의 비용은 받지 않지만 그 수고와 헌신 그리고 고마움에 보통 자발적 기부금을 낸다. 트레일 매직은 하이커들을 위해 트레일에 물이나 음식 등을 모아둔 것을 말한다. 지치고 힘든 상황에서 만난 트레일 매직은 하이커들을 춤추게 한다. 운이 좋다면 하루에 2번의 트레일 매직을 만날 수 도 있다.
이 길에는 특별한 문화가 있는 것 같다. 세상에 수많은 트레일이 있고 아직 안 가본 곳이 많지만, 이 길은 길을 걸을수록 그 안에서 무언가를 느끼게 한다. 한국의 정과 비슷한 무언가 애틋하고 끈끈한 것. 시간이 지나고 걸은 길의 거리가 늘어갈수록 그 것에 빠져들었다. 트레일을 걸으며 많은 친구들을 만났다. 같이 걷고, 먹고, 머물며 시간을 함께 보냈다. 나라도, 인종도, 언어도 다른 외국인이지만 쉽게 친해질 수 있다는 것과 마을마다 하이커라는 이유로 대접받는 것은 정말 색다른 경험이었다. 혼자 시작한 여행에서 마지막은 혼자가 아니였다.
오랜 시간 꿈꿔왔던 길에서 난 무엇을 느꼈을까?
애초에 퇴사를 하지 않고는 떠날 수 없던 길이었기에, 7년을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여행을 떠났다.처음에는 마냥 좋아 다 내려놓고 그 순간을 즐기려 했으나, 이 여정이 끝나고 현실로 돌아갔을 때의 걱정과 두려움 때문인지 이 길을 통해 무언가를 자꾸만 얻으려 하는 내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극한의 도보여행이라는 타이틀 아래 스스로를 높이고 주목받고 싶은 욕심에, 있는 그대로를 즐기기보다 무언가를 자꾸 찾아내려 애를 썼던 것이다. 그 결과 몸은 물론 마음까지 망신창이가 되었고, 순수한 목적의 여행은 오염될 수 밖에 없었다. 다행히 부상 치료차 들린 지인의 집에서 스스로를 되돌아볼 수 있었고 그간의 욕심을 다 내려놓음으로써 복잡했던 머릿속이 조금씩 가벼워질 수 있었다. 일주일의 휴식을 뒤로하고 다시 돌아간 트레일의 첫날밤, 텐트 밖으로 머리만 내어놓고 밤하늘을 수놓은 별을 올려다보며 이런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내 안에 담을 수 있는 여유와 이를 허락해 준 자연에 감사했다. 그동안 같은 길 위에 있었지만 허영을 쫒으며 놓쳤던 것들, 순수한 아름다움과 자유 그리고 나 자신. 내려놓고 나니 비로소 하나둘씩 느낄 수 있는 게 눈에도 보였다. 밤하늘을 수놓은 수많은 별들처럼.
내가 4,300km에 이르는 이 길의 마지막에서 느꼈던 것은 뭔가 거창하고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이 길을 걸으며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지난 날 그저 당연하다 생각하고 잊고 지냈었던 작은 일상의 소중함이었다. 이전에는 항상 당연함 속에 묻혀 잊힌 일상의 소중함 대신, 다른 자극에서 오는 짜릿함을 쫓기만을 원했던 것 같았다. 그러다 그 다른 자극이 되려 일상이 되어버린 순간, 그제야 잊고 지냈던 그 작은 일상들이 참 소중한 행복이었구나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벗어나려고만 했던 무료한 일상들을 오히려 갈망하게 되는 경험을 통해, 행복이라는 건 따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작은 것하나에서소중함을느끼고,지금이순간만족할수 있으면 그게 바로 행복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오롯이 나와 함께 할 수 있었던 시간들. 세상 누구보다 소중한 나에 대해 그동안 몰랐던 것들을 이 길을 걸으며 느끼고 잘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외면했던 스스로를 위한 시간을 이 길을 통해 가질 수 있었고, 5개월이라는 여정 속에서 보냈던 나와의 시간은 나를 더욱 값지게 만들어 주었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
어떤 여행을 떠나거나 긴 길을 걷더라도, 단순히 그 여정을 통해 무언가 나에게 큰 변화가 올 것이라는 기대는 안 하는 것이 좋다. 다만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깨달음은 얻을 수 있고, 그 깨달음을 내 것으로 소화시키는 데는 노력이 필요하다. 노력 없이 무언가 변화되길 바라는 것은 욕심일 뿐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인생에 한 번쯤은 오롯이 나를 위한 시간을 가져보는 것은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홀로 걸으며 나를 알게 되는 시간 말이다.
글 · 김광수
김광수 회원은 그 스스로를 하루를 살아도 후회없는 하루를 살고 싶은 하이커라고 소개한다. 자연속에서 시간을 보낼때 물 흐르는 소리, 새가 지저귀는 소리등 작은 것에 감동한다는 그는 자연에서 불편함을 감수하면 녹색생활이 어렵지 않다고 이야기 하는 녹색연합회원이다.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PCT) 나를 찾는 길’의 저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