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시선」 서울에 가서도 꼭, 그렇게 웃고 다니길!

2019.01.21 | 행사/교육/공지

나의 직업은 제주 할망(할머니)들과의 만남을 기록하는 것이다. 뚜벅뚜벅 걷다가 인연이 닿아 만나게 된 할망의 일상 속에 새처럼 날아들어가 내 이야기를 전하고, 그들 나누어 준 만큼의 이야길 듣다가 파다닥 또 가던 길로 날아가는 것이 나의 일이다. 세상에 별 직업 다 있다 하겠지만, 그렇게 6년간 할망들을 만났고 지금도 만나고 있다. 이 일을 하게 된 계기는 매우 길지만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었다고 짧게 시작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일제강점기, 제주 4.3, 한국전쟁이라는 대한민국 현대사의 비극 3종 세트(?)를 차례로 경험하며 꾸역꾸역 살아온 팔구십대의 할망들은 자주 같은 말씀을 하신다. ‘살당보난(살다 보니=어쩌다 보니) 살아졌다.’ 파란만장한 시공이 마치 약속이나 한 듯 여덟 자로 압축되어 있다. 나의 일은 사실 ‘살당보난’과 ‘살아졌다’ 사이에 존재하는 그들의 속사정을 듣고 기록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하나다. 예상치도 못한 일이 일어나 온 세상이 무너지더라도 그것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의 힘. 내가 ‘인간력’이라 부르고 배우고 싶은 그 힘이 그들에겐 있기 때문이다.

여하튼, 그렇게 할망을 만나며 평화로이 보내던 나의 2018년은 6월에 접어들어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들어갔다. 제주4.3 70주기를 맞이하여 그간 만나온 할망들의 이야기를 책으로 엮어 막 세상에 내놓았을 무렵, 살아있는 전쟁의 파편이 내가 사는 제주로 떠내려왔기 때문이다. 5백 명에 육박하는 사람들이 전쟁을 피해 그것도 8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예멘에서 마치 우주선을 타고 뚝, 떨어진 것 같은 정신없는 현장에 내가 있었다. 그러한 연유로 지금 이 글을 쓰고 있지만 사실 나는 난민 전문가도 인권활동가도 아닌 일개 제주시민일 뿐이다.

고작 5백 명이라 느낄 수도 있는 숫자이지만, 제주에 온 이들은 일상의 풍경을 바꾸어 놓았다. 길을 걷다가, 편의점에서, 햄버거를 먹다가 불쑥 예멘인들을 만날 수 있을 정도가 되니, 사람들은 시시각각 변화하는 난민을 둘러싼 여러 가지 사태들을 몸소 겪으며 그들과 함께 살아야 했다. 일부 사람들은 정체 모를 두려움으로 그들을 피해 다니기도 했지만, 적극적으로 예멘인을 돕는 사람들이 내 눈에는 훨씬 많아 보였다. 주변 지인이 하나 둘 팔을 걷어 붙이고 자신이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이들을 돕는 것을 보며 참 많은 것을 보고 배웠고 말이다.

내가 제일 처음 그들을 만난 것은, 갈 곳이 없는 예멘인들에게 텐트를 빌려주던 외국인 영어 선생님 커뮤니티를 통해서였다. 그리고 며칠 후 비가 내렸다. 비 오는 공원에서 텐트를 치고 예멘인들이 잔다는 소식을 들은 내 친구 하나가 자신의 작업실을 선뜻 숙소로 내놓았다. 이삼십 명이 머물 수 있는 그녀의 작업실은 이후 수 개월간 예멘인들의 임시 보호소가 되기도 했다. 이불을 갖다 주게 된 것을 계기로,나는그녀의 작업실로 들어온 수십 명의 예멘인과 친구가 되었다. 필요한 물품들을 모으고, 주변인들에게 기부를 요청하다 보니 매일 그곳으로 출퇴근하는 일이 벌어졌고, 나 같은 사람들은 하나둘 늘어만 갔다.

그러다가 예멘 난민신청자들이 스스로 밥벌이를 하고 먹고 살 수 있는 취업허가가 떨어졌다. 전쟁으로 가진 모든 재산을 잃고 고향을 떠난 이들은,어떻게해서든 일을 해야 자기도 살고 두고 온가족도산다. 그러니 모두가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또다시 전투 아닌 전투를 해야만 했다. 그 후 제주 곳곳의 사장님들과 전화 통화를 하는 업무가 시작되었다. 오징어 배 선장님, 광어 양식장의 사장님, 고깃국수집의 사장님, 에어컨, 채석장, 귤밭, 게스트하우스 사장님 등, 평소 같으면 이어지지도 않을 인연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갔다. 나의 역할은 사장님과 예멘인들 사이에서 고용에 필요한 이야기를 영어로 통역하고, 서로에게 서로의 사정을 알기 쉽게 설명하는 거였다. 일이 잘 성사되면 매우 보람찬 일이 었지만, 잘 안되면 매우 진이 빠지는 일이기도 했다.

또 한편에선, 말이 안 통해 답답한 예멘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선생님 집단이 생겼다. 모두가 자원봉사자들이다. 한국어를 모르는 이들에게 영어로 글을 가르치는 일이란 매우 전문성이 요구되는 일이지만, 언젠가부터 이들은 자신들의 영어 공포증을 극복해내며 틀린 영어로 당당하게 한국어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보고 있으면 너무 재밌어서 눈물이 흐를 지경이었다. 그렇게 웃고 울고 하면서 모두는 조금씩 친해져 갔다. 자원봉사를 하는 사람들은 몸이 아픈 친구들을 병원에 데려가기도 했다. 나 역시 몇 차례 간 적이 있는데, 전쟁통에 총상을 입은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친구들의 몸은 정말이지 보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이었다. 의사들도 처음 보는 전쟁의 총상이라 했다. 아직 총알의 파편이 박혀있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그런데도 그들은 닥치는 모든 일을 하며 하루하루를, 우리와 함께 살았다. 지난 5개월간 말이다.

그런 친구들에게서 요즘 매일 같이 듣는 말이 있다.“나내일서울가.그동안너무고마웠어.”얼마전 1차 난민심사를 마치고 대부분의 친구가 ‘인도적 체류 허가’를 받았다. 난민으로 인정되는 것은 아니지만, 원하는 곳에 가서 일하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살 수 있다는 허가다. 총상을 입은 친구도, 태어난 딸을 한 번 안아보지도 못하고 온 친구도, 전 재산을 하루아침에 잃어버린 친구도 사실 전쟁과 폭력을 피해 피난 온 사람들인데 그들이 ‘난민’이 아님을 법무부는 선포했다. 아직 난민을 받아들일 수 있는 충분한 여력이 없는 건지, 보이지 않는 두려움에 떠는 국민들을 위한 선택인지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 나 같으면 매우 화가 났을 터인데 친구들은 의외로 덤덤하다. 오히려 쫓아내지 않고 있게 해 주어 고맙다는 말도 한다. 쫓아내어 마땅한 사람이란 없다고 아무리 말해도, 전쟁을 겪은 자들은 그저 하루하루 살아있음이 충분하다 한다. 그렇게 요즘 나는 이들과 헤어지는 중이다. 제주에 머물며 하던 일을 계속하는 친구도 있지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많은 이들이 큰 도시로 떠나가는 중이다. 마치 고등학교를 갓 졸업했던 십여 년 전의 겨울처럼, 친하게 지내던 한 무더기의 친구들이 섬을 떠나는 것을 목격하는 요즘이다.

팔구십 년의 파란만장한 시간을 살아낸 할망들은 자주 ‘내일 죽는 게 소원’이라 말씀하시며 웃는다. 예멘 친구들에게 소원이 뭐냐 물으면 ‘전쟁이 끝나 집으로 가는 것’이라 한다. 그들의 소원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보인다. 한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딱히 없는 내게 그들은 큰 선물을 주었다. 나의 삶이라는 것도 역시,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나 산산이 흩어질지 모른다는 불안함의 연속이지만, 그 불안함이야말로 나를 움직이게 하는 힘이라는 걸 알게 된 것. 그리고, 할망들과 예멘 친구들의 이야기 속을 정신없이 오고 가며 만남과 이별을 거듭하다 보니 영원히 노력해도 익숙해질 것 같지 않은 헤어짐이 전보다 무겁지 않게 느껴지기 시작한것.그들이내게준매우큰선물이다.그러니 이젠 ‘언제 다시 만나게 될까?’ 하며 이별을 아쉬워하지 않고 ‘세상에 이런 만남은 또 다신 없겠지!’하며 헤어짐을 감사해야겠다고 마음먹는다.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치의 축복을 담아, 삼삼오오 제주를 떠나가는 친구들에게 메시지를 남긴다.

사랑하는 친구들아, 서울에 가면 여기보다 일자리도 많고, 제주도 시골 마을에서 보지 못했던 새로운 것들도 많아서 당분간 눈이 휘둥그레지겠지? 그래서 내 생각이 나지 않더라도 나는 이해한다. 나도 그랬었으니까! 그렇더라도, 부디 몸조심하고 좋은 사람들 많이 만나 덜 불행하길 늘 기도할게. 전쟁이 끝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소원이라는 너희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언지, 끊임없이 생각하고 행동하도록 할게. 그러니 무슨 일을 하더라도 다치지 말고, 혼자 외롭게 아픈 일만 없으면좋겠다. 나는 서울을 별로 안 좋아해서 너희들을 보러 가는 일이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혹시라도 연휴가 생기면 제주에 놀러 오고. 올 땐 선물 사 오는 거 잊지 마. 짧은 시간이었지만, 만나서 너무 즐겁고 고마웠다. 너희들의 밝은 웃음이 가끔 보고 싶을 거야. 서울에 가서도 꼭, 그렇게 웃고 다니길! 안녕, 앗살라마!

PS. 제 친구들을 잘 부탁합니다.

· 정신지

정신지님은 제주할망 전문 인터뷰 작가다. 제주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일본으로 건너가 12년간 지역연구학을 배웠다. 2012년 귀향하여 제주의 노인들을 만나고 만남의 기록을 나누며 시간여행 중이다. 노인은 문제가 아니라 해결책이 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이 시대에 ‘할망의 희망’을 전파하고자 하는 자칭 ‘제주할망 광신론자’. 노인과의 만남, 기록, 나눔의 세가지를 실천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노력 중이다. 현재 프리랜서 필드워커, 인터뷰어, 칼럼니스트, 방송리포터, 풍각쟁이 등 다방면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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