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식지/녹색칼럼] 우리가 함께 밥을 먹을 때면

2019.07.03 | 행사/교육/공지

밥에 관한 잊지 못할 기억이 하나 있다. 십년 쯤 전이다. 매일같이 많은 회의와 일정에 쫓기며 일하던 때였다. 일 생각을 떨구지 못해 주말에도 긴장 속에 묶여 지냈다. 이러다가 몸도 마음도 쓰러지겠다 싶어 피정을 하러 갔다. 수녀원도 피정도 처음이었다. 도착하자마자 햇볕이 가득한 식당에서 차려준 점심의 첫 밥술을 뜨는 데 갑자기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태어나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눈물이 멈추지 않아 밥 한 그릇을 다 비우지 못하고 수저를 내려놓았다. 무슨 일이었을까. 따뜻하게 나를 맞아준 소찬의 정갈한 밥상에 깊은 위로를 받은 것이다. 오랫동안 누르고 있던 쌓인 피로와 긴장을 녹여 눈물로 터트려 준 것은 밥이었다.

‘밥심으로 산다’고 했다. 사전을 보니 밥심은 ‘밥을 먹고 내는 힘’이다. 오래전 엄마에게 자주 들었던 말이다. 감기로 골골하는 내게 억지로 밥을 권할 때, 고된 명절 노동을 마치고 밥상에 앉으며 엄마는 그렇게 밥심 추임새를 날리셨다. ‘밥과 힘’의 조합인 밥심의 심을 ‘마음 심’으로 풀어서 ‘밥을 먹고 내는 마음’이라 풀어도 좋겠다. 밥이 힘이고, 밥이 마음이다. 정말 우리는 밥심으로 산다. 그렇지 않은가.

‘거리의 만찬’이라는 어느 공영방송의 프로그램이 있다. 밥심의 정체를 아낌없이 보여주는 방송이다. 출연자들은 밥을 먹으며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눈다. 숨겨진 이야기, 꺼내기 주저했던 속내를 주저 없이 표현한다. 그 많은 얘기를 연결해주는 건 밥이었다. 앞에 차 한 잔만 있었다면 이야기가 그렇게 진하게 나올 수 있을까. 분명 ‘차와 밥’ 사이에는 거리가 있다. 얼마 전에는 성 소수자 자녀를 둔 엄마들이 출연했다. 나오는 것부터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아이들의 성 정체성을 알고 충격받고 부정해서 미안했던 마음도, 있는 그대로 아이를 받아들이게 된 힘겹던 과정도 솔직하게 꺼내 놓는다. 눈물도 흘리며 서로 공감해가는 사이에 닫히고 다친 마음들은 어루만져진다. 밥심이 마음이 되고, 빈 속을 채우는 음식을 넘어 밥은 마음을 공명해주는 매개가 돼 주었다.

내가 ‘우리 밥 먹자’는 말을 자주 한단다. 사실 이 원고를 청탁받기 전까지는 잘 못 느꼈다. 음
그랬었구나.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지만 ‘차 한잔 하자’ 대신에 ‘언제 우리 뜨신 밥 먹자’고 했다. 차 한 잔보다 밥 한 끼가 더 좋고, 그냥 밥보다는 ‘뜨신’ 밥 먹자는 말이 더 좋다. 특별한 이유는 없지만, 그렇게 말하면 만나자는 내 마음이 더 편안하게 전해질 것 같았다. 그렇다고 만나야 할 사람들 모두에게 밥 먹자고 하는 건 아니다. 차 한잔으로 간단히 용건만 나누어도 아쉬울 것 하나 없는 관계도 있다. 반면 조금 더 가까워지고 싶은 사람, 고마운 사람, 격려나 위로가 필요한 사람에게는 예외 없이 꼭 그렇게 한다. 조만간 ‘우리 뜨신 밥 먹자’고. 밥 값을 내는 건 물론이고, 모든 건 함께 밥 먹을 사람에게 맞춘다.

‘뜨신 밥’은 개인과 개인이 관계를 쌓아주는 계기가 되어준다. 밥 약속의 과정에는 내 마음을 전하고, 또 상대를 알아가는 여러 순간이 잠재되어 있다. 밥 먹기 전부터 서로 얘기를 나눈다. 밥을 점심으로 할지 저녁으로 할지, 특히 무엇을 먹고 싶은지 말이다. 메뉴를 못 정하고 만났을 때는 대에게 이렇게 묻는 습관이 있다. 점심 약속일 경우에는 아침은 뭘 먹었냐고, 저녁일 경우에는 점심은 뭘 먹었느냐고 말이다. 바로 전의 끼니가 빵이나 국수였다면 밥을 먹자 하고, 밥이었다면 뭐든 먹고 싶은 거 먹자고 한다. 같은 것보다 다른 음식을 먹게 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식당에 들어가 바깥 풍경이 보이는 쪽의 자리에 앉으라고 권하는 것도, 마주 앉아 서로 수저를 챙겨주고 컵에 물을 따라주는 시간도 참 좋다. 메뉴판을 보며 뭘 먹을지 상의하고, 맥주 한잔할까 말까를 정하는 시간에 서로의 마음은 조금씩 녹녹해진다. 한참 얘기를 나눈 듯 편안하다.

밥을 먹으며 상대의 젓가락이 자주 가는 반찬을 슬며시 가까이 밀어주는 일은 기꺼운 일이다. 자기가 주문한 음식을 맛보라며 살짝 덜어주는 일도 기쁨이다. 이렇듯 같이 밥 먹는 일은 관계를 쌓는 행위이다. 마주한 사람을 조금씩 더 알아가는 일이다. 반찬 접시에 서로의 젓가락이 오가고, 식 맛이 어떤지도 얘기 나눈다. 밥 먹는 모습과 버릇, 채식과 육식 등 서로 다른 식성은 사람을 좀 더 알게 해준다. 누구와 어떤 마음으로 먹는가에 따라 밥의 의미는 달라진다. 밥이 주는 ‘힘과 마음’의 농도도 또한 달라진다. 문득 억울하게 자식을 잃고 하늘이 무너진 한 사람이 떠오른다. 이가 없는 이 세상에서 조금도 행복해지고 싶지 않다는 고 김용균의 어머니 김미숙 씨. 오늘도 무너진 하늘을 부여잡고 과로사한 젊은 집배원의 어머니를 찾아가 아픔을 나눈 그녀에게 뜨신 밥 한 끼 대접하고 싶다.

글. 윤정숙 님(녹색연합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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