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식지] 농업과 음식문화의 전수자, 토종씨앗

2019.06.26 | 행사/교육/공지

겨울도 가물었는데 봄날도 가물다. 지하수를 파지 않은 엄마는 연신 개울물을 퍼 나르지만 개울도 말라 막 심은 모종들이 걱정이라고 하면서 물을 아껴가며 작물들에게 분배한다. 엄마는 숙명처럼 텃밭을 가꾸는 사람이다. 생산물을 어디 파는 것도 아니지만 식구가 늘어나면 늘어난 만큼 텃밭을 늘린다. 일을 다니시면서도 아버지와 함께 500여평의 텃밭에는 엄마가 먹을 양식과 함께 큰아들과 막내딸과 양가 사돈들의 먹거리들이 심고 거둔다. 올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처음으로 엄마의 농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엄마는 농민의 자식이고 내 기억이 닿는 한 엄마는 자그마한 텃밭이라도 계속 가꾸어 왔다. 산 아래 텃밭에 낙엽과 풀, 음식 부산물들을 모아 검은 퇴비를 만들고 늘 손으로 제초작업을 해왔다. 500평의 텃밭에는 콩, 감자, 고구마, 마늘, 토란, 시금치, 울금, 생강, 고추, 김장거리, 각종 쌈채소, 가지, 파프리카, 들깨, 참깨 등이 연중 쉴새 없이 심어지고 거두어진다. 돈이 많지는 않았지만, 농사로 많은 사람에게 베풀고 나눠 먹는 부모님을 보며 위대함을 느꼈었다. 나도 저만큼의 농사는 짓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늘 해왔다.

내가 먹을거리를 내가 생산한다는 것은 그만큼 돈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일일 것이다. 5월 초 엄마와 종묘상에 다녀왔다. 고추모 250포기를 예약하고 파프리카 2포기, 토마토 6포기, 서리태 2봉지와 함께 고추모에 함께 해주어야 좋다는 비료를 사 왔다. 사장님은 친절하게도 심는 날짜까지도 알려주셨다. 이미 오랜 시간 텃밭을 가꾸어 온 엄마의 입장에서도 종묘상에서 사 오는 씨앗과 모종은 해마다 새로울 수밖에 없고 사장님이 주시는 정보는 너무도 소중한 것이다. 농사에 관여하는 그 많은 것들을 관장하면서도 씨앗을 가지고 있지 않은 엄마는 종묘상이 권하는 비료를 안 하면 한해 농사를 망칠 수도 있다는 불안이 있다. 먹을거리가 상품화 되면서 기업은 제일 먼저 씨앗을 소유하기 시작했다. 지식재산권이라는 이름으로, 특허라는 이름으로 농민의 손을 떠나 기업으로 넘어갔다. 로열티에 갇힌 씨앗은 더이상 농민의 것이 아니다. 로열티를 지급해야 하는 기업의 씨앗은 이윤을 높이기 위해 한 번 밖에 발아하지 못한다. F1(잡종 1대) 품종❶, 터미네이터❷와 트레이터❸ 등은 일회성 품종이기 때문에 매년 농민들이 새롭게 사야 하는 일회용 씨앗이다. 한 해의 농사를 좌우하는 씨앗을 구입하는 농민에게 함께 사용해야 한다는 농약과 비료를 사지 않는 대모험을 하기는 쉽지 않다.

한 해 농사는 씨앗을 심는 것으로 시작하여 씨앗을 채종하여 갈무리하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갈무리할 때 가장 튼실하고 예쁜 것은 종자로 남기고, 나머지는 양식이 된다. 이렇게 남겨진 씨앗은 자연과 땅에서 얻은 좋은 양분과 농민의 경험을 통해 쌓인 지혜가 더해져 이듬해 더 좋은 맛을 내고 더 많은 수확을 할 수 있다.

이렇게 보유된 씨앗에 담긴 경험과 지혜는 어느 한 농민의 것이 아닌 농촌공동체의 산물이다. 대를 이어 더 좋은 씨앗들이 이어지고 경험들이 축적되어 교류되면서 땅과 자연과 사람에 적응하고 발전하며 다양한 생태계를, 건강한 지구를 만들어오는 바탕이 되었다.

씨앗은 농업의 전수자이자 음식문화의 전수자가 된다. 이러한 씨앗을 누구의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올 해 내가 심어서 거두었어도 나만의 씨앗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지금은 이러한 씨앗을 토종 씨앗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농민들도 더이상 채종하지 않는다. 대를 이어 씨앗을 전수받을 수 있는 사람이 없는 농촌과, 한국 농업의 현실, 그리고 씨앗을 빼앗아 버린 기업들에 의해 채종은 갈수록 어려워진다.

다행히 우리네 할머니들이 지금까지 토종씨앗을 채종하고 다시 심으며 지켜온 씨앗이 있다. 그리고 뜻있는 사람들이 토종씨앗을 찾고 알려내면서 여성 농민들과 일부 농민들이 토종 씨앗을 받아 농사짓기를 이어가고 있다. 토종 씨앗의 가치가 조금씩 퍼져나가며 마음을 알아주는 소비자들도 함께 응원하고 지키고 있다. 지금 전국 각지에서 어렵게 토종 씨앗 채종포 운영 등을 이어가면서 토종 씨앗에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사라지지 않게 하기 위한 실천이 계속되고 있다.

건강한 농사, 행복한 먹거리, 다양한 문화의 한 영역으로 토종 씨앗이 제자리를 지켜가려면 사람들이 기억하는 맛으로 전수되어야 하지 않을까? 얼마 전 장 담그기가 무형문화재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가치 있는 일이지’라며 끄덕이다가도 사라져가는 것들을 지키기 위한 몸부림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지금 발 딛고 있는 농업농촌의 현실이 녹록지 않기에 토종 씨앗이 이런 몸부림에 포함되는 건 아닌지 왠지 헛헛한 것은 나만이 느끼는 것은 아닐 것이다.

 

글. 서근영님
서근영 님은 언니네텃밭에서 일하면서 삶의 근간인 먹거리와 농업의 대안적 변화의 움직임에 촉을 세우며 함께 하고 있습니다.

 

[참고 및 부분 출처]

❶ F1 종자는 우수한 형질의 두 작물의 교잡을 통해 만들어진 종자입니다. 하지만 형질이 고정되지 않아 채종해서 다시 심으면 다음세대에는 부모세대와 동일한 형질의 것이 아니라 다양한 형질의 것이 나옵니다. 동일한 농산물을 수확하기 위해서는 다음해에 다시 F1 종자를 사서 심어야하지요. (출처: 종자,세계를 지배하다)
❷ DNA 조작을 통해 수확물이 다시 싹을 틔울 수 없도록 만든 기술. 삽입된 유전자가 씨앗이 여물기 전에 스스로 독소를 배출해서 배아가 파괴되도록 고안된 것이다. (출처: 종자,세계를 지배하다)
❸ 촉진자를 식물세포에 삽입하여 특정 화학 유도물질을 쓸 때만 촉진자가 활성화 되도록 12 하는 기술. 즉 종자를 심어 수확을 하려면 반드시 특정 화합물을 사용해야만 된다.

 

이 글은 녹색희망 267호 <먹을까, 사랑할까>에 실린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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