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재난시대의 회복력, 지역에서 찾다 – 유창복 미래자치분권연구소 소장

2020.12.22 | 행사/교육/공지

[인터뷰]


재난시대의 회복력, 지역에서 찾다 – 유창복 미래자치분권연구소 소장

“코로나 이후, 환경운동의 방향의 키워드로 저는 로컬회복력, 로컬리질리언스라는 말을 뽑고 싶어요. 코로나 시대, 기후위기 시대, 즉 재난사회, 없는 사람이 훨씬 더 힘들어지는 사회, 없는 사람도 그럭저럭 함께 일상을 살아낼 수 있는 지역의 힘을 만드는 일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유창복 미래자치분권연구소 소장은 성미산에서 마을 활동을 시작해 서울시 협치자문관을 거쳐 현재 미래자치분권연구소를 만들어 지역과 자치, 분권을 이야기하고 있다. 지역, 풀뿌리 운동이 코로나 시대의 대안으로 떠오른 요즘, 기후위기의 해법으로 ‘로컬뉴딜’을 전파하고 있는 유창복 소장님을 만나 로컬과 환경운동의 접목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과거의 시민운동

코로나 이후, 환경운동의 의제와 방식 두가지가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가 물었을 때, 먼저 운동 방식에 대해서는 주체와 당사자의 문제가 생각이 난다. 1987년 우리 사회는 민중운동의 성과로 절차적인 민주화를 이루었고, 그 주체는 우리 사회의 엘리트, 이른바 시민단체였다. 방식은 민중운동인 ‘짱돌’이 아니라 ‘법제도, 청원’ 등 평화적이고 법적인 방식을 통해 이루어낸 절차적 민주주의와 실질적 제도개선이다. 그게 바로 참여연대 등 메이저 시민단체의 시작이기도 하다. 실제로 이를 통해 호주제부터 시작해서 보행권 등 굵직굵직한 우리 사회의 제도적 전환을 해냈고 사회적인 많은 지지와 신뢰를 받았었다. 

하지만 저는 이것이 2000년을 정점으로 조금씩 하강하고 있다고 본다. 시민단체도 정파에 움직인다는 정파논쟁에 휩싸이고 있고, 내부적으로는 분열도 일어나고 있다. 외부적으로는 국회의원, 정당, 언론에 지속적으로 견제당하고 있다. 또한 시민단체가 지속적으로 분화되면서 그 결과 안 다루는 문제가 없는, 유능한 전문성을 갖추어가면서 분과주의라는 벽에 부딪히게 되었다. 문제를 종합적으로 보는 시야를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시민들은 시민단체의 진정성을 지지했지만 지지는 CMS였지 직접행동은 아니었다. 그런 상태로 시민운동이 내리막을 걸으면서 시민 없는 시민운동이라는 말도 생기고, 소규모 풀뿌리 운동 단체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상당부분 정당이 의제를 흡수해가고 시민단체는 효능감이 별로 없는 상태라고 본다.

새로운 공공성의 주체, 주민

그런 면에서 새로운 공공성의 주체에 대한 고민도 있었다고 보여진다. 군사쿠데타 이후엔 군, 87년 이후엔 시민사회, 둘다 정치적으로는 다르지만 결국 엘리트였다. 한쪽은 위임받은 권력, 한쪽은 자임이라는 방식으로 지지를 받았지만 어쨌든 엘리트이고 에드보커시라는 방식이었다. 그럼 그 다음은 뭐냐고 물었을 때 저는 당사자 운동이라고 본다. 그런데 이미 당사자운동의 시대적 변화의 사인은 2000년대에 나타나고 있었다. 월드컵, 노사모, 효순미선, 광우병, 촛불탄핵까지 이어지는 시민의 직접행동은 그때부터 오버래핑되고 있었다. 이건 시민단체의 성명서 읽고 하는 방식이 아니라 스스로 조직하는 거다. 누군가에게 조직당하고 설득당하는 것, 시민들은 이제 싫어하고 재미없어한다. 나는 나로 움직이는 거다. 그런 직접행동의 양상이 온라인에서는 디씨인사이드 같은 네트워크로 나타나고, 지역사회에서는 꼬물꼬물 생활의 의제를 가지고 움직이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세가지 주체와 시대적 흐름을 종합해보면 공공성의 새로운 코드가 나올 거라고 본다. 광장의 시민이 아니라 생활에서의 시민, 즉 주민이 중요하다. 광장에 시민들이 나오는 건 나라가 위급할 때 뿐인 거고, 일상 즉 삶터와 일터, 생활현장에서 공공성이 나올 수 있다. 탄핵으로 나라는 구했다. 그런데 삶 속으로 돌아와서는 무엇이 변했는가? 대통령만 바뀌었지 세월호도 해결이 안 되었고 젠더문제와 불평등은 해결될 기미가 없다. 적폐 이야기는 광장의 언어이지 생활의 언어는 아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생활인으로서의 시민, 주민은 어떻게 공공적으로 어떻게 행동하고 조직되고 움직일까 생각을 해보면, 일상의 의제로 움직인다. 그게 동네고 지역이고 마을인 거다. 2010년에 몇몇 기초단체장과 마을정책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그걸 증폭시킨게 박원순 서울 시장이다. 그 과정을 통해 지역사회라는 실체가 생겼다고 본다. 시민사회는 거칠게 보면 광화문 단체라는 별명이 있다. 중앙정부를 상대로하는 애드보커시를 하지, 지역사회의 주민들과 일상을 공유하며 일상의 삶을 주민과 함께 혁신해나가는 흐름에 있지 않다. 그 흐름이 오버래핑 되는게 마을 공동체를 비롯한 지역사회 움직임이라고 본다. 

서울만 봐도 공공적으로 느슨하게 연결된 주민들의 네트워크가 많이 생겼다. 중요하다고 본다. 이 네트워크는 공공성의 감각을 유지시켜주고, 민주적 소통의 태도를 환기시키는 장치이다. 개인이 아니라 삶에 뿌리를 둔 진정한 시민으로서의 자기 성장의 채널 속에 있게 해준다. 이를 토대로 조직된 시민운동, 지속가능한 시민의 활동을 가능하게 한다. 삶터에서의 느슨한 연결망을 매개로 한 이웃들과 공공적 협업의 경험과 감각이 시민들이 공공적 주체가 되어가는 시작인 셈이다.

시민운동과 지역사회의 결합

우리 사회 공공성의 주도성이 국가주도에서, 엘리트 시민사회, 그 다음으로는 지역사회로 변화하고 있다. 그래서 저는 시민사회가 지역사회와 어떻게 연결될 것인가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본다. 시민단체가 실이라면 재봉틀의 북실(지역사회)을 연결해야하는데, 시민사회가 지역사회의 맥락에서 미시적으로 재구성되어야 진정한 의미의 시민사회가 등장할 수 있다. 

그런데 관성이라는 게 있다. 시민단체는 자꾸 짧게만 보고 애드보커시만 하는데, 애드보커시의 위력은 자꾸 떨어지고 있다. 의제 주도성도 없고 융합적이지도 않고, 행정 칸막이만큼 시민사회의 칸막이도 심하다. 게다가 여긴 명령 내릴 사람도 없고 다 바쁘다. 그러다 보니 각자 자기 일에 매몰되서 협업도 안 되고 메타 의제라는 건 상실된다. 갈수록 힘이 빠지고 있다.

그런데 왜 시민단체가 지역사회와 결합해야 하느냐, 우리 사회의 의제의 전문성과 정부와의 협치적 협상력을 가장 많이 경험한 집단이 시민사회단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게 분과주의로 흩어져 있는 실정이다. 지역주민들과 결합이 되어야 하는데, 이것은 계몽적 구도로는 아쉽게도 잘 되지 않는다. 이것이 문턱이기도 하다. 

성미산 마을만 해도 시민단체 출신도 많고 저도 학생운동을 했으니 활동가가 아니라고 말은 못하지만 저는 활동가라고 스스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저는 아이 잘 키우려고 그 동네로 이사갔고 애 키우다보니 친해져서 여기까지 온거지 내가 나라를 구하려고 그렇게 한 것은 아니다. 그런 관념자체가 없다. 그런데 시민단체는 처음부터 활동가다. 시민을 만났을 때 구도 자체가 계몽적 구도인 것이다. 그런데 그건 한계가 있다. 자기가 당사자로서 삶을 함께 해결해나감에 있어서 좀 설치는 사람. 저는 설치는 주민을 활동가라고 부르는데, 저는 그중에서 좀 설쳤던 거지 내가 활동가로서 이끌어가고 계몽해가는 위치가 아니었다. 활동가와 시민 사이의 벽을 깨야한다. 그러려면 시민단체가 지역성을 회복해야한다. 

지방의 시민단체는 어느정도 지역적 근거가 있다. 하지만 서울은 광화문단체지 지역단체가 아니다. 특히 서울은 전환이 어렵고, 메이저에 있을수록 그럴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운동의 주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당사자, 주민, 지역사회, 느슨한 연결망을 통한 일상의 혁신 이런 에너지들이 새로운 주도성의 실천으로 뜨고 있다. 아직은 낮은 상태이지만. 그런데 이게 왜 중요하냐면 이게 되어야 시민단체도 힘을 받고, 국가 공공성도 허투루 하지 않는다. 결국 이 세 개가 함께 가는 가야한다. 그래서 지금은 시민 당사자성을 조직하고 강화시킬 때고, 국가는 이를 방해하지 않는 위치에, 시민단체는 이를 지원하는 위치로 배치시키는 구조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면 그 속에서 메이저 시민단체들의 포지션은 뭘까, 고민해봐야 할 문제다.

기후위기는 블랙홀

한편 운동 의제에 대해 말해보자면, 기후위기는 더 이상 환경 의제가 아니다. 기후위기는 블랙홀이다. 그 안에 모든게 다 들어있고 이제는 분과주의적 접근으로는 문제에 다가가기도 해결하기도 어렵다. 분과주의는 기본적으로 행정체계와 많이 연관되어있는데, 행정체계로는 극복할 수도, 리드할 수도 없다. 융합적인 문제의식과 해결의 시도를 하지 않으면 어려울 것이다.  

우리 산업이 자원이 무한이라는 전제 하에, 노동은 절약할 수록 혁신이고 성장이라고 믿어온 자원집약형, 노동절약형 산업구조가 기후위기의 원인이다. 자원을 막 쓰니까 기후위기가 온거고 사람을 안쓰니까 실업위기가 온건데 이게 다 탄소 기반의 산업이지 않는가. 저는 기후위기를 환경이슈로 접근해선 안된다고 본다. 오히려 그건 본질을 왜곡시키는, 워싱의 효과가 있다. 전환을 가장 반대할 사람이 탄소기득권인데, 그들이 ‘지구가 망하게 생겼으니 나도 좀 도와야지’ 하는 건 택도 없는 소리다. 자기 물적기반이 다 흔들리는 이야기일텐데 말이다. 

석탄발전소 노동자가 해고될텐데 전환에 찬성할까? 기후위기는 모르겠고 당장 해고되면 내 자식은 어떻게 키우나? 이렇게 정의로운 전환은 바로 불평등 이슈와 닿아있다. 어떻게 보면 너무 어려운 일이기도 하지만 오히려 한방에 같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지구도 구하고 불평등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의제고, 마지막 기회다. 분과주의적인 세계관으로는 해결될 수 없고 진짜 위기의 핵심이 무엇인지 있는 그대로 보면서 각자 어떻게 조직되고 기여할 것인가 고민해야 한다. 판이 완전히 재구성되는 흐름이 아니면 지리멸렬할거라 본다. 

하지만 우리사회가 이제 명령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각자, 혹은 함께 시너지를 내면서 어느순간 임계치를 도달하는 매우 우연적이고 복잡계적인 전환을 할 것이다. 그게 훨씬 빨리 연결되고 빨리 연결시키는 방법이라고 본다. 누가 한마디 한다고 움직이는 시대가 아니니까. 

코로나 시대 뉴노멀은 로컬

그래서 그게 모두 결합되는 키워드가 뭘까 생각해보니까 로컬인거다. 코로나가 보여주듯이 비대면은 대안이 아니다. 비대면은 너무 계급적으로 불평등하다. 공공과 사회가 감당해야할 것들이 모두 개인에게 전가되었다. 결국 안전한 근거리의 믿을만한 사람들을 분산해서 만나는 안전한 대면만이 답이다. 믿을 수 있는 사람들끼리 소규모로 안전한 일상관계를 유지하면서 로컬 회복력을 갖추는 것이 코로나 시대의 뉴노멀이 되어야 한다.  

산업도 reshoring이 이루어지고 자국중심주의가 강화되고 있는데 로컬이 중요해질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그린뉴딜의 실천전략도 로컬이라고 생각하고 지역회복력을 높이는 로컬뉴딜 정책이 추진되어야 한다. 탄소도 줄이고 일자리를 만들고, 사회적 안전망도 촘촘히 구축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야 한다. 탄소를 줄여야 한다는 이슈 중심의 운동은 의제의 세팅하는 단계에서는 필요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정의로운 전환은 사회적 안전망을 이야기하지 않으면 대중을 설득할 수 없다. 대중이 움직이지 않으면 그 운동은 끝이다. 그래서 판이 완전히 재구성되어야 한다. 위기가 기회다. 평소라면 택도 없겠지만, 위기니까 안될 것도 될 수 있다. 대중교통도, 도시농업도 다 전쟁 중에 생긴거고, 그런 식으로 코로나를 기회로 이용할 수 있지 않을까?

전반적인 느낌은 이런 거다. 다차원의 공공성과 자원과 주체들이 복잡계의 원리로 우연적으로 움직였지만 어떻게 결국 그 방향으로 수렴될까. 어떤 전환의 이미지를 갖고 살아야할까. 그런 전환의 경험과 돌파구들을 어떻게 공유하며 미세조정 해나갈까. 그 어느때보다 복잡계적 전환의 감수성이 필요한 때 같다. 나를 따르라 이런 건 이제 통하지 않는다.

질문

  • 녹색 – 시민단체가 주민들과 결합하는 방식의 상이 잘 그려지지 않는다. 개인 활동가로써 마을 속으로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과연 중앙 단체가 지역 기반의 운동과 결합할 수 있을까?

유창복 – 그런 고민의 대책으로 나온게 랩이라고 본다. 폴리시 랩, 리빙랩, 로컬 랩 다양한 이름이 있다. 관계망으로써의 마을 공동체는 매우 느슨하기 때문에 그걸로만은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문제해결을 위한 관계와 에너지와 의지가 모였을 뿐이다. 주민들에게 알아서 자치하라고 해서 자치가 아니다. 실제로 문제 해결에 필요한 행정의 자원과 시민사회의 솔루션이 들어와야 한다. 그런데 그 주도권이 주민에게 있어야 자원과 솔루션이 문제해결에 맞춰 배치가 되는데 그동안 주도권이 주민에게 없었다. 그동안은 행정이 자원을 주는 자였기 때문에 이니셔티브를 가져왔지만, 행정의 칸막이 때문에 항상 문제가 생겨왔다.

결국 본질이 융합이 곳이 이니셔티브를 가져야 한다. 행정의 자원을 쓰되, 주민 이니셔티브로 돈을 쓰고, 전문가들의 전문 솔루션들이 시민들에게 공개되고 전달되어야 한다. 그래서 삼자가 융합적이고 문제 해결을 위한 워킹그룹 같은 대등한 협력관계로 들어와야하는데 실제는 그렇지 못한 실정이다. 행정은 돈 잘 쓰는지 감시하고, 시민사회는 겉돌고, 연결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이것을 융합시키는 협력의 틀로 저는 랩이라는 방식을 제안하고 있다.

철저히 문제해결력에 도움이 되는 사람들이 콜라보하는 일의 문화, 워킹 그룹 단위로 전환되어야 한다. 그래서 시민단체도 거시적인 것은 한 부서에서 맡고, 상당의 인력은 지역사회에 배치해야 한다. 시민단체는 행정 협상력도 있고, 의제 전문성도 있다. 이런 역량이 인정받는 구조에 가서 역할을 하면 된다. 여기서 시민단체는 문제해결에 도움이 되는, 동네에 가장 알맞은 구체적인 솔루션을 제공해야 한다. 거시적인 제도 설계가 아니라 로컬 데이터에 기반한 로컬 솔루션이 나와야 하는 거다. 이제는 공공정책이 모두 읍면동으로 내려오고 있고, 그 수준에서 문제가 풀려야 하는걸 행정도 아는데 사례가 없는 상태다. 여러 개의 현장을 할 필요도 없이 내가 잘 아는 현장 몇 군데를 정해서 3-5년동안 랩을 통해 깊이 있는 사례를 만들어야 한다. 일단 사례가 잘 만들어지면 다른 지역에 퍼지는 것은 금방이다. 

  • 녹색 – 환경운동이 지역사회로 들어가는 방법도 고민이 되지만 반대로 주민들의 풀뿌리 운동이 대부분 복지 중심이고 환경이나 생태는 아직은 사소한 영역에 머무르고 있는 실정이다. 지역 운동의 의제가 환경이슈까지 어떻게 확장 될 수 있을까? 환경이슈라는 게 굉장히 크거나 혹은 굉장이 작거나 둘 중 하나라고 느껴질 때가 있다.

유창복 – 규모가 큰 이슈는 알고만 있어도 만족하고, 지지하는 수준이고 작은 이슈는 매일 일상으로 해야하기 때문에 어렵게 느껴진다. 2박 3일 집회는 하겠는데 매일 매일 분리 배출은 나도 어렵다. 하지만 위기라서 될 것이다. 안하면 안되니까. 대표적으로 코로나 시대에 우울증을 해결하려면 근린 숲을 가꾸어야 살 수가 있다. 도시 농업도 마을 정원 개념으로 진화 하고 있다. 에너지 절약은 물론이고 에너지 생산, 스마트 그리드, 태양광, 폐기물, 분리배출 등 의제는 널려 있다. 

하지만 분리배출 이런 것만 해도 대단히 귀찮은 일상인데 이건 대면관계가 아니면 지속성이 없다. 잔소리하는데 안싸우려면 관계가 있어야 한다. 철저히 로컬, 커뮤니티 베이스로 실천이 들어오지 않으면 지속가능 하지 않다. 자전거 타기, 걸어다니기, 동호회 등 일상의 행동을 지지하고 격려하는 구조가 만들어져야한다. 이념적이고 강압적이지 않으면서 계속 자극받는 구조속에 들어가지 않으면 일상적으로 해낼 수가 없다. 내가 단체 활동가도 아니고 툰베리도 아니니까. 그 긴장이 유지되는 일상이 커뮤니티이다.

  • 녹색 – 생활 환경 영역에서는 그런 노력이 부족했고 필요하다고 본다. 기후 운동도 코로나 정국을 맞닥뜨려서 풀뿌리 300이라는 각 지역 시민들이 지역구 국회의원을 조사하고 직접 질의하는 캠페인을 해보기도 했는데 호응도 적고 잘 되지 않았다. 

유창복 – 이제 시민들이 계몽적 정보에 의해서 설득되고 조직되지 않는다. 그래서 넛지 전략을 쓰지 않으면 안된다. 사소한 자기동기와 행동이 공공의 정책목표와 무슨 관계가 있을까? 그걸 연결시키는 넛지라는 텐션이 어떻게 걸리느냐가 중요하다. 그런데 그건 구조적으로 포착되는 게 아니라 일상에서 우연히 포착된다. 

그래서 정책과 행동을 우연적인 맥락에서 포착해내는 감각이 없으면, 외부자의 시선으로는 한계가 있다. 일상적으로 연결이 되어 있어야 하는데, 그러면 그 지역 안에 들어가서 살아야 되냐, 그게 아니라 그걸 구조화 시켜주는게 랩이다. 내가 지역에 살지 않아도 일상적 감각을 꾸준히 제공받고 거기에 개입할 수 있는 장치인거다. 그런데 거기에 혼자 들어가서는 안되고 지역의 활동가들과 협업해야한다. 정보와 자원을 제공해주는 전문가적 위치를 보장받으며 들어가야하고. 그게 먹히려면 라포가 형성되어야 하고. 그런 것 없이 목표와 계획을 가지고 들어가면 쉽지 않다.

  • 녹색 – 시민단체 애드보커시에 두가지에서 한계가 있다고 본다. 정부에 어떤 정책을 요구하지만 잘 듣어주지 않고 있고, 중앙에서 법제도를 바꿨을 때 그게 지역에서는 미시적으로 작동되지 않기도 하는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유창복 – 87년 이후의 시민단체의 운동방식은 법제도, 청원, 개혁, 위원회 같은 것이다. 하지만 잘 안 바뀌지 않는다. 시민단체가 ‘들러리’라는 이야기도 나오는 이유다. 서울시에 위원회가 300개가 된다. 잘해야 회의 3번 하는데 ‘좋은 이야기 잘 들었습니다’ 하고 끝이다. 거버넌스가 대단히 약화되고 형식적으로 돌아가고 있다. 예전같지 않은 거다. 개입의 수준과 개입의 효능감이 많이 떨어져 있고 그래서 시민단체가 힘든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위원회는 구조적으로 자문이지, 결정권이 없다. 그래서 서울 민주주의 위원회를 만들어서 합의점 관점으로 가본거지만,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 

결정적으로 시민단체가 문제 해결력이 없는 것이 문제이다.  협업하니까 문제가 해결되더라, 하면 안할 이유가 없다. 삶의 현장은 복잡계이기 때문에 우연적 실험, 태도가 없다면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나올 수 없는데 현재 시민단체 시스템도 매우 분과주의적이고 경화되어 있다.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에서 종합적인 솔루션이 나오는 걸 보았는가? 저는 잘 모르겠다. 어쨌거나 그런 위기이고 우리 수준이 그 수준인데 이것을 어떻게 돌파할 것이냐, 방향이 어디냐고 물었을 때 저는 그게 구체성이고 현장과 당사자라고 생각한다.  돕고 싶은 사람과 도울 수 있는 사람과 자원이 붙어 있을 때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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