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집을 가는 데도 미군의 허락이
<녹색순례 여섯째 날> 동두천, 삶터를 빼앗은 미군기지
아침에 출근하면서 미군부대에 들러 출입증을 보여주고 퇴근할 때도 미군부대를 통과해 집으로 돌아와야 하는 마을이 있다. 미군부대로 가로막힌 마을, 동두천 걸산동 주민들은 미2사단 캠프 케이시를 통과해야만 마을로 들어갈 수 있다. 명절 때 걸산동을 방문하는 친척들, 걸산동 안의 문화유적지를 답사해야 하는 사람들은 사전에 미2사단에 공문을 보내 허가를 받아야 한다.
Where is our land?
녹색순례단은 캠프 케이시를 통과해 걸산동을 방문하고 기지 뒤의 산을 넘어 미군 포사격장 건설을 막아낸 쇠목마을 주민들을 만나고 캠프 하비를 지나 다시 캠프 케이시로 돌아올 예정이다. 순례를 출발하기 10일전 순례단은 미2사단에 공문을 보냈지만 미2사단의 답변은 통과불허, 이유는 ‘다른 길이 있다’라는 것이었다. 10분 거리면 갈 길을 6시간 거리고 돌아가라는 말이다.
이유같지 않은 이유를 대며 순례단의 길을 막아선 캠프 케이시 앞의 집회로 하루가 시작되었다. 캠프 케이시 정문은 굳게 잠겨져 있고, 경찰들이 정문을 막아섰다. 닫힌 철문, 전날 녹색순례단을 격려 방문한 전우섭 목사는 “미 2사단은 한국전쟁 때 사단지를 분실한 불명예로 한국에서 철수를 하더라도 미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외국에 주둔해야 한다. “라며, 미군기지 문제는 한국만의 문제가 아님을 강조하였다. 우리는 미2사단 상징기를 만들어주기로 했다. 인디언 머리를 자르던 미국인들의 용맹성을 상징한다는 인디언머리가 그려진 캠프 케이시의 상징기, 즉석에서 순례단이 만든 기를 그들에게 건네주었다.
“We lost our land, you lost flag. Now here is your flag, where’s our land?”
깃발을 줄 테니 기지를 돌려달란 말이다.
순례단은 길이 막혔다면 길을 만들어서라도 가야한다. 우리는 캠프 케이시 철책선을 따라 왼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걷기 시작한지 10분도 채 되지 않아 케이시의 오폐수가 동두천변으로 콸콸 쏟아져 나오고 그 왼편으로 펼쳐진 19홀짜리 미군 골프장에선 한국인들이 여유롭게 골프를 치고 있다.
캠프 케이시는 98년 부대 내에 건축폐기물을 불법 매립한 것이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었다. 폐아스콘, 우레탄, 콘크리트 그리고 석면을 불법 매립했고 그 양은 수백만 톤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아직까지도 이 어마어마한 양의 불법 폐기물은 미2사단 영내 하천변에 그리고 걸산동 일대에 그대로 매립되어 있다. 길이 끊긴 곳은 수풀을 헤치고 계곡을 건너며 또 ‘이 길이 아니다’를 몇 번이나 반복한 후에 우리는 캠프 케이시가 왜 소요산 자락에 자리잡은 것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계곡이 깊고 넓게 뻗쳐져 있고 소요산 정상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어 천혜의 자연요새가 되기 때문이다. 캠프 케이시 정문에서 후문까지 가는데 걸린 시간은 모두 6시간, 고생 끝에 걸산동에 도착했다는 기쁨보다는 소요산 자락 깊숙이 광대한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캠프 케이시의 크기에 모두들 질려버렸다. 캠프 케이시는 총 430만 평에 달한다.
쇠목마을의 해원탑
쇠목주민대책위 김병규 위원장의 어린 시절은 미군 사격장에서 쏜 총에 맞아 죽은 동네 사람과 총탄소리, 길을 검거하고 벌이는 사격훈련으로 학교에 가지 못한 날들에 대한 기억으로 가득 차 있다. 그는 1996년 3월 15일, 미군이 쇠목마을 논과 밭에 폐탱크 8대로 가져다 놓은 사건 이후로 미군이야기만 나오면 절로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이 되었다. 미8군은 주민들과 아무런 사전협의 없이 쇠목마을에 포사격장을 신설하기 위해 표적물로 탱크를 갖다 놓은 것이었다.
조상 대대로 살던 집에서 쫓겨날 처지에 놓은 11세대 42명의 쇠목마을 주민들은 경운기로 트럭으로 공사현장을 막아섰다. 심지어 프로판 가스통을 싣고 캠프 케이시 앞에 가서 강력한 항의를 했다. 미군은 시위를 벌이는 김병규 위원장을 수갑 채운 채 엎드려 놓고 군화발로 폭행을 가하기도 했다.
결국 포사격장 건설은 철회되었지만 2000년에는 또다시 쇠목마을에 탄약고를 짓는 계획이 발표되었다. 겨울 석달동안 동두천 시내에 천막을 치고 탄약창 건설 반대 농성을 하면서 춥고 서러워서 함께 많이 울었다는 쇠목마을 주민들은 탄약창이 들어설 부지 입구에 4미터 높이의 해원탑을 세웠다.
13명의 주민이 구들돌을 다듬고 난 잡석을 모아 꼬박 한 달을 걸려 만든 해원탑에는 ‘미군사격장으로 쇠목주민에게 지워진 멍에 같은 고통의 세월이 50년’에 이름을 통탄하면서 ‘그 선조들의 한을 풀고 이 고통을 후손에게 물려주지 않기 위해 탑을 세웠다’고 적혀 있다. 국방부와 미군에서는 이 탑을 무너뜨리지 않으면 법적 조치를 취하겠다고 경고를 했지만 지금도 이 해원탑은 쇠목마을 입구에서 마을을 포크레인과 탱크로부터 지키고 있다.
괘씸죄인지 마을로 들어오는 350미터의 도로는 포장도 안된다. 미군 공여지인 그 땅에 미군이 포장을 허가하지 않기 때문이다. 쇠목마을 바로 아래 93년도에 폐쇄된 사격장은 지금 폐차장과 차량 해체장으로 쓰인다. 기름이 그대로 땅에 스며들고, 각종 건축폐기물이 한가득 쌓여있는 이 버려진 땅은 미군이 지나간 자리에 사람이 살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알고 있는지. 미군기지의 허락을 밤낮으로 얻어야만 집으로 갈 수 있는 주민들이 있고, 산골짜기에서 농사만 짓던 농부들이 집회신고 내는데 도사가 되었고 하루하루 미군과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 치열하게 고민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녹색순례 특별취재팀 – 사이버 녹색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