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 백두대간 녹색순례, 대장정이 시작되다

2004.05.13 | 녹색순례-2004

천국으로 가는 계단을 오르며 녹색순례는 시작되었다. 녹색연합 활동가들이 녹색순례를 다녀와야 비로소 활동이 시작된다고 할 만큼 기다리고 기다렸던 봄의 대장정 백두대간 녹색순례, 그 첫 걸음이 시작되었다. 강원도 태백산을 시작으로 설악산 아래 점봉산까지 열흘간 이어지는 긴 고행의 걸음이다.

태백산 천제단으로 이어지는 숲 속은 이름 그대로 ‘천국으로 가는 계단’이었다. 피나물 군락과 얼레지 군락을 비롯 바람꽃, 제비꽃 같은 남부지방에서 이미 져버린 봄꽃들이 아직도 화려한 자태를 뽐내며 숲속을 수놓고 있었다. 과연 ‘천하의 중심’이라 할만큼 태백산은 아름다웠다.

또, 태백산은 북방계식물의 남방한계선이자 백두대간의 절정이라고 한다. 5월 중순 순례단을 맞이한 태백산은 제대로 된 천연의 숲이 무엇이라는 것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이번 녹색순례는 백두대간을 주제로, 우리 땅의 등줄기가 무너지고 파헤쳐진 생생한 현장을 보고 느끼기 위해 찾아가는 걸음이다. 태백산의 공군폭격장을 시작으로 삼척의 대규모 석회광산, 대규모 고랭지 농업단지, 도암댐, 오대산 포장도로, 점봉산 양수댐 같은 곳곳의 환경 현안 지역을 둘러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아픈 상처만 품고 있는 것은 아니다. 백두대간이 얼마나 빼어난 국토의 보물창고인가도 새록새록 느끼게 될 것이다.

지난 1월 달부터 녹색연합의 본부조직과 지역조직에서 녹색순례 준비팀이 꾸려지고, 5개월간 답사를 서너 차례 거쳐 백두대간 중에서 가장 생태계가 빼어나고, 현안이 집중된 강원도의 태백산부터 설악산까지를 여정으로 잡은 것이다. 순례단이 첫발을 들인 태백은 하늘도 울고, 산도 울고 있었다. 미군폭격장이 온다는 소식 때문인지 신선했던 천연림의 공기는 낮게 깔려 차가운 기운으로 휘 감았다. 가랑비에 안개가 자욱한 숲속을 거쳐 숨이 턱까지 차오는 유일사를 넘어 등산로를 쉼없이 오르고 또 올랐다. 빗속을 허위허위 걸어 닿은 천제단은 하늘의 중심인 태백의 진면목을 보여 주지 않았다. 공군폭격훈련장으로 산의 반 이상을 죽임의 문화에게 자신의 신성한 영역을 허락한 비통함을 숨기고 싶은 까닭일까? 그래도 순례단은 민족의 영산인 태백산의 천제단에 고개 숙여 무사한 순례길을 빌고 또 빌었다.  



천제단을 내려온 순례단은 이 산의 아픔을 가장 깊게 간직한 현장으로 내달았다. 공군 필승사격장이다. 태백산이 불타고 있는 현장이다. 순례의 첫날인 5월 12일 오후 5시, 강원도 영월군 상동읍 천평리 공군 필승사격장 정문 앞에서 영월군민 300명과 태백시민 100여 명, 환경단체인 녹색연합 50명, 약 500여 명이 참가한 ‘미군폭격장의 태백산 이전반대 화형식 및 삭발대회’가 열렸다. 매향리 미 공군사격장이 태백산으로 이전해 올 것에 대해 반대하는 지역주민들의 첫 움직임이 투쟁결의대회로 신호탄을 올린 것이다. 추적추적 봄비가 하루종일 내렸건만 집회장의 열기는 비장함과 분노로 절정에 이르렀다.

“미군폭격장 결사반대.”
“민족의 성지에 미군폭격장이 웬 말이냐.”
“폐광의 소외도 서러운데 미군폭격장이 웬 말이냐.”
“민족의 정기 태백산이 분노한다. 몰아내자 미군폭격장.”
“폐광되어 한번 죽고 폭격장으로 두 번 죽는다.”



분노한 주민들의 구호가 플래카드와 피켓으로 붉은 물결을 이루었다. 결의대회는 지역 인사들의 규탄사와 투쟁결의를 밝히는 연설들이 이어지면서 뜨겁게 달아올랐다. 특히 매향리 사격장 반대운동을 오랫동안 이끌었던 전만규 위원장이 매향리 주민들과 함께 경기도 화성에서 이곳 강원도 영월까지 연대를 위해 한 걸음에 달려와 참석했다. 인상깊은 것은 참석자들이 대부분 50대 이상 60대와 70대 같은 노년층이라는 점이다. 사실 지금까지 국내의 미군관련 집회에는 주로 20, 30대가 참여했고, 매향리 사격장과 파주 스토리 사격장 규탄집회 때 일부 노년층의 지역주민들이 참석하기는 했으나 이번처럼 주류를 이루지는 않았다. 미군 문제가 지역주민들의 생존권을 위협할 때 보수층이나 노년층도 저항에 나서고 있음을 증명해준 자리기도 했다.  



강원 영월 상동읍 번영회장과 상동중고 동문회장, 지역 주민을 대표하는 여섯 분이 삭발식도 거행했다. 이 삭발식에는 매향리 대책위의 전만규 위원장도 동참하여 미군으로 인한 고통과 피해는 너나 구별없는 우리 모두의 문제라는 모습을 직접 보여 주었다. 결의대회의 절정은 화형식이었다. 주한미군사령부와 미합중국 국방부, 대한민국 국방부 같은 상징물을 불태웠다. 미군을 향한 민중들의 분노가 먼 이라크만의 일이 아닌 대한민국에서 가장 속 깊다는 강원 심산유곡에서도 벌어지고 있었다. 영월 상동읍 주민들은 지난 4월 20일부터 25일동안 태백산 필승사격장 부대 정문 앞에서 천막농성을 진행 중이다.

영월지역 주민들이 주최가 된 이번 집회를 계기로 미군폭격장의 태백산 이전에 대한 지역의 규탄목소리는 불길이 점점 거세지고 있다. 오는 5월 22일에는 태백시에서 시민단체와 지역주민들이 중심이 되어 만 명 규모의 대규모 집회를 개최할 예정이다. 미선이?효순이 집회 이후 가장 큰 규모의 미군규탄 집회가 될 전망이다. 태백산 미군폭격장을 통해 다시 한번 확인한 것은 반미를 조장하는 것은 미군당국과 그 눈치를 보는 국방부가 실체라는 점이다. 주민들은 우려로 시작된 목소리는 한 달 가까이 되면서 분노와 규탄으로 번지고 있다. 그러나 실체인 국방부는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태백산에 깃들어 사는 주민들은 그래서 더욱 분노하고 있다.

강원도 영월군 상동읍 천평리 일대 1,800만 평에 자리잡은 공군폭격훈련장은 민족의 영산을 전쟁터로 만들고 영원히 그 가치를 불구로 만든 분단 조국의 또 다른 상처였다. 태백산은 생태와 환경, 문화와 역사가 지리산이나 설악산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그런데도 아직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지 못하고 그저 도립공원으로 근근이 명맥을 유지하는 것은 바로 폭격훈련장 때문이다.

※ 현장사진은 녹색순례 2004 홈페이지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http://pilgrim.greenkorea.org/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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