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려진지 30-4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나무 밑둥의 선명한 톱질 자국은 지난 반세기 동안 이 일대의 숲이 겪었던 고단한 시기를 보여준다. 이미 말라버리고 썩어버린 나무 밑둥만으로도 이 나무가 100년 가까이 되었을 아름드리 금강소나무였음을 추정하기에 충분하다. 금강소나무 산판의 역사는 일제시대 때부터 시작되었다.
식민지의 울창한 원시림은 그들에게 너무나 탐나는 자원이었다. 하지만 한국전쟁 이후 정부 주도하에 이루어진 울진, 봉화, 삼척지역의 산판은 일제강점기보다 더 맹렬했다. 이 땅에서 금강소나무의 원시림이 사라진 것을 두고 남 탓만 할 수는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
한국사회가 일제와 전쟁, 산업화를 거쳤던 격동의 시기에 울진, 삼척, 봉화 일대에는 어마어마한 원시림이 벌목으로 사라졌다. 북쪽으로 삼척의 육백산 일대부터 가곡면의 덕풍계곡 응봉산을 거쳐 울진 북면과 서면 일대에서 산판이 벌어졌다. 용소골과 덕풍계곡으로 유명한 응봉산의 삼척 가곡면 골짜기 구석구석에는 레일을 깔았다. 탄광의 화차처럼 협궤보다 약간 작은 규모의 레일을 깔아서 동해안의 호산(삼척시 원덕읍)까지 직접 베어진 금강소나무를 반출하였다.
그나마 원형의 금강소나무림을 볼 수 있는 소광리 금강소나무림도 한국전쟁 이후 본격적인 산판이 이루어졌다. 소광리 지역주민 박영웅(67) 씨는 “자유당시절 정부는 개인업자들에게 얼마만큼의 돈을 받고 산림 벌채를 허가해 주었다”고 말했다. “산에서 자른 나무를 산 아래로 내려 보내기 위해 골짜기에 나무판으로 널찍한 미끄럼틀 같은 것을 만들었다. 금강소나무의 껍질을 벗겨 아래로 내려 보내고, 정부가 임대해준 미제 군용차에 실어 봉화군 소천면의 분천역으로 이송했다”고 한다. 당시 정부에게 금강소나무림은 거저 돈을 벌 수 있는 노다지와 같은 자원이었다.
소위 춘양목이라는 이름은 대규모 산판이 벌어진 울진과 봉화의 금강소나무가 봉화 춘양읍을 통해 외지로 나간 데서 유래되었다. 지금은 금강소나무의 상징이 울진 소광리이지만 실제로 금강소나무가 가장 발달했던 곳은 통고산과 일월산 줄기의 사이에 있는 봉화 소천면 남회룡리 일대였다고 한다. 지금도 남회룡리의 서쪽에 위치한 장군봉에는 유사 이래 최대 산판의 흔적이 일부 남아 있다.
[imgcenter|090515-2.JPG|400|▲ 소광리 금강소나무림 내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는 수령 520년의 할아버지 소나무. 50년 전만 해도 용소골, 소광리, 응봉산, 봉화군 일대에는 이런 나무들이 지천이었다. |0|1]
금강소나무는 다른 소나무와 달리 중간부터 껍질이 얇아지면서 점점 붉은 색을 띈다. 껍질이 얇아지지만 결코 약해 보이진 않는다. 오히려 나무 상단의 붉은 부분은 이제 막 용광로에서 나온 쇳덩이처럼 단단해 보인다.
금강소나무는 다른 소나무에 비해 나이테가 촘촘하고, 줄기가 수직으로 곧아 있다. 그래서 다른 소나무에 비해 뒤틀림이 적고 강도도 5배 이상 높다. 목재로는 한반도의 최고라 할 만하다. 불과 몇 십 년 전까지 대대적인 산판이 이루어졌고, 지금 정부가 적극적으로 보호하는 것도 모두 같은 이유이다.
울진과 삼척의 경계에서 남쪽인 울진군 서면의 소광리 금강소나무림에 가니, 금강소나무가 빼곡하게 들어선 숲과 함께 케이크에 초를 꽃아 놓은 것처럼 듬성듬성 고작 몇 그루의 금강소나무만이 자라는 곳도 볼 수 있었다. 대대적인 산판 이후 자연 스스로의 경쟁에서 활엽수인 신갈나무 등 참나무과 나무들이 금강소나무를 밀어냈다. 그래서 산림청이 금강소나무를 살린다는 이유로 활엽수 종류의 나무를 모두 베어냈기 때문이다. 이는 ‘생태경영’이라는 이름하에 실시하고 있는 후계림 조성사업의 우울한 단면이다.
대대적인 산판으로 인해 대거 사라진 금강소나무림을 지키겠다는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사람의 기준으로 보다 가치 있는 나무를 보호하고 육성하기 위해 그 외의 다른 나무는 모두 베어버린다는 것이 금강소나무가 겪었던 산판과 무엇이 다른 것일까.
[img|090515-4.JPG|600|▲ 소광리 금강소나무 생태경영림. 조선시대부터 왕실, 문화재용으로 조선시대부터 왕실의 보호를 받았으며 지금도 국가가 관리하고 있다. 남대문 복원에도 이곳에 있는 금강송 166본을 사용했다. |0|1]
얼마나 기다려야 그 숲을 다시 볼 수 있을까
[imgleft|090515-5.JPG|250|▲ 소광리 황장봉계 표석. 조선 숙종 6년 금강소나무를 보호하기 위해서 나라법으로 나무를 함부로 베지 못하도록 바위에 새겨둔 경계표지. |0|1]울진 소광리 금강소나무 길로 들어서기 전 새재를 넘다보면 60년이 넘은 아름드리 금강소나무에 노란 페인트칠을 해둔 것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이는 남대문 화재사고와 같이 국가문화재가 불에 타 소실되거나 세월에 의한 부식이 심할 경우 대체재로 쓰기 위해 국가에서 따로 관리하는 것이다. 소광리 금강소나무 숲에서도 금강소나무 166본이 화재로 불타서 유실된 남대문을 복원하는데 쓰였다.
조선시대부터 금강소나무는 건축물을 짓거나 왕실의 물품을 만들기 위해 많이 쓰였다. 나무의 단면 안쪽이 붉고 바깥쪽이 누런 것이 사람의 창자를 연상시킨다 하여 ‘황장(黃腸)’이라고 불렀고, 왕실에서 특별히 보호했다. 왕실은 안정적으로 금강소나무를 이용하기 위해 울진 소광리, 봉화, 영덕, 영주 등의 금강소나무림을 ‘황장봉산(黃腸封山)’으로 지정하여 관리하였다.
소광리의 대광천 상류에 있는 황장봉계표석은 왕실이 관리하는 금강소나무림의 경계를 표시한 것이다. 일반인이 출입해 벌채를 하면 곤장 100대의 중형에 처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왕실에서 이용하는 황장목이 되려면 350년생 이상이 되어야 한다. 이곳에는 350년 이상이 된 금강소나무가 빼곡히 서 있었을 것이다.
[imgright|090515-6.JPG|250|▲ 응봉산 정상 부근 금강소나무. 수령 4, 50년의 금강소나무들은 성인 2명이 손을 맞잡아야 감싸 안을 수 있을 정도로 그 직경이 넓다. 원시림의 금강송은 잘라낸 밑둥에서 성인 8명이 둘러앉아 밥을 먹어도 될 정도의 크기였다고 전해진다. |0|1]현재 소광리 금강소나무림의 대부분의 금강소나무가 보통 둘레가 1m 안팎이고, 키가 20m, 나이는 60년 생 정도의 나무이니, 숙종 때 황장목으로 지정되었던 나무가 지금까지 살아 있었다면 숲은 얼마나 울창하고 웅장했을까? 그 웅장함을 다시 보려면 우리는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할까?
춘양목, 황장목, 적송, 금강소나무…, 나무 한 그루에 이렇게 많은 이름이 붙여진 경우가 또 있을까? 이 이름은 모두 사람들의 사랑을 오래도록 받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고, 동시에 사람들에 의해 잘려나가고 또 보호되었던 이유가 되기도 했다. 민족의 상징, 뛰어난 목재, 유전자원으로서 금강소나무의 값어치가 크고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누가 모를까. 그러나 목재의 가치만큼이나 지금 이대로의 숲 그 자체가 얼마나 중요한 것이지 지나온 금강소나무의 역사를 통해 이제는 깨달아야 하지 않을까?
– 글 : 보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