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순례 <동백꽃 다시 핀다>, 첫 번째 이야기: 제주 사려니 숲길에서 만난 비극

2018.04.09 | 녹색순례-2018

녹색연합은 1998년부터 봄이 되면, 배낭을 메고 온 몸을 자연에 의지한 채, 열흘 간 도보순례를 떠납니다. 주민들의 생생한 증언을 듣고 이 땅의 아픈 곳, 그 신음 소리를 들으며 대안과 공존의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제주 4.3 70주년인 올해는 ‘동백꽃 다시 핀다’라는 주제로 제주 전역의 4.3 유적지와 분쟁 지역을 걷습니다.

4.3 평화공원을 시작으로 북촌, 우도, 성산, 남원 그리고 강정과 송악산을 지나 한라산을 넘는 코스입니다. 순례는 4월 3일부터 4월 12일까지 9박 10일간 진행되고, 다섯 번의 기사를 연재합니다.

사려니 숲길 속 4.3 유적지
제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산책로라는 사려니 숲길을 걷는다. 첫 날 녹색순례 참가단의 숙소였던 절물휴양림에서 나와 남쪽 비자림로(1112번 도로)를 건너 숲으로 들어선다. 곧게 쭉 뻗은 울창한 삼나무 사이에서 심호흡을 한다. 공기가 다르다. 머리 위 까마귀 떼가 가끔 정적을 깰 뿐, 완만하고 평탄한 숲길은 한적하다. 숲길을 따라 1km 남짓 걷다보면 아치형 나무다리 넘어 화장실 표시가 보인다. 그곳에서 한라산 쪽으로 방향을 틀어 10분 이상 쭉 걸어가면 제주 4.3유적지(교래 북받친 밭) 안내 표지판을 만날 수 있다. 걷는 길 나뭇가지 곳곳에 4.3길이라고 적힌 동백꽃 리본이 묶여있기도 하다.

표지판 방향 안쪽 길로 들어서니 움막 터가 보인다. 제주 4.3 당시 토벌을 위해 군부대가 마을에 주둔하면서 이를 피하려는 봉개리 주민들이 은신하던 곳이자, 주민들이 떠난 이후에 무장대 사령부인 이덕구 부대가 잠시 주둔했던 곳이다. 그래서 이덕구 산전(山田)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앞장서서 길 안내를 하던 조성봉 감독이 움막 터 앞 자그마한 제단 앞에 걸음을 멈춘다. 그곳엔 녹슬고 깨진 무쇠 솥과 부서진 토기가 나뒹굴고 있다. 추위와 배고픔, 죽음의 공포 앞에 부서지고 깨졌을 당시 주민들의 삶을 떠올려 본다.

예술 작품에도 허용하지 않던 4.3 ‘사건’
조성봉 감독은 가방 안에서 보리빵과 과일, 술병을 꺼내 제단 위에 올렸다. 익숙한 손놀림을 보니 이 곳에 여러 차례 방문했던 듯싶다. 음식 때문인지 까마귀들이 움막 터 뒤 참나무, 서어나무 가지에 자리 잡고 있다. 조성봉 감독은 녹색순례 참가단에게 문재인 대통령의 제주 4.3 70주년 추념사를 인용하여 자신을 소개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추념사에서 “4.3을 기억하는 일이 금기였고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불온시 되었던 시절, 망각에서 우리를 일깨워준 분들도 있었습니다”라며 조성봉 감독을 포함하여 4.3을 다룬 작가와 시인, 가수 등을 일일이 호명한 바 있다.

조성봉 감독의 ‘레드 헌트(빨갱이 사냥)’는 1992년 북제주군 조천읍 구좌면 다랑쉬굴에서 발견한 11구의 시체가 발견된 사건에서 시작된다. 영화는 주요 증언과 보고서 기록을 종합하여 4.3 사건 당시 동굴에 피신해 있던 사람들을 토벌대가 굴 밖에서 연기를 피워 질식사시킨 비극의 내막을 드러낸다. ‘레드 헌트’로 인해 조성봉 감독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었으며, 영화를 상영한 인권운동사랑방 서준식 대표는 구속됐다. 이후 조성봉 감독의 구속영장은 기각됐고, 서준식 대표 역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는 무죄판결을 받았지만, 그 과정에서 ‘레드 헌트’는 여러 이유로 상영이 제지되는 고초를 겪었다.


링크:조성봉 감독은 2012년 본인의 유튜브 계정을 통해 ‘레드 헌트’ 전체를 공개한다

중학교 사회선생님은 왜 무장대 대장이 되었나
‘레드 헌트’ 제작으로 고초를 겪은 지 20여 년이 지난 후에야, 현 대통령에게 4.3 사건을 망각하지 않게 해주었다며 치하 받은 조성봉 감독의 표정은 착잡해 보였다. 4.3 피해자에 대한 조사 작업과 유해 발굴은 진행되고 있고, 문재인 대통령은 국가 배상·보상도 언급했지만 여전히 4.3은 역사적으로 명명(命名)되지 못한 채 ‘사건’에 머물러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2000년 1월 12일 공포된 4.3 특별법(정식명칭은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과 희생자 명예 회복에 관한 특별법)은 「제주 4.3사건 진상보고서」를 통해 ‘4.3’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 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서청(서북청년단)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선(단독선거)·단정(단독정부)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 지역이 전면 개방될 대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 충돌과 토벌대의 진압 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586쪽)

중학교 사회선생님이었던 이덕구가 당시 목격한 제주 사회는 어떠한 모습이었을까. 해방이 되어 징병 징용갔던 사람들 6만 여명이 기대를 품고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일자리가 없었고 대흉년과 전염병까지 겹쳐 식량부족이 큰 사회문제였다. 더구나 일제시대 경찰과 관리들이 미군정에서도 그대로 자리를 차지하고 부정부패를 일삼아 도민들의 불만은 극에 달했다. 1947년 3월 1일, 3·1절 기념대회에 3만 여명이 모여 ‘3.1 정신으로 통일 독립’을 주장했다. 3·1절 기념대회에 참석한 군중에게 경찰이 총을 발사함으로써 민간인 6명이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고, 이것이 제주 4.3의 도화선이 된다.

3.1절 발포사건에 항의하며 제주도 전체 직장의 95%인 166개 기관과 단체에서 대규모 민·관 총파업이 이어졌다. 먹고 살기 극심하게 어려운 상황에서도 대규모 총파업을 진행한 것은 그만큼 제주 도민들의 분노와 아픔을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미군정은 제주도지사와 군정 수뇌부들을 모두 외지인으로 교체했고 육지의 경찰과 서북청년단을 대거 제주로 파견해 파업 주동자에 대한 검거작전을 벌였다. 급기야 1948년 3월 경찰서에서 고문치사 사건이 세 건이나 발생하였고, 고문치사로 죽은 이들 중 조천중학교 교사였던 이덕구의 제자도 있었다.

토벌대가 최소 12,000 명 학살
1948년 4월 3일, 350명의 무장대가 봉기하기 전, 이러한 배경이 있었음에도 미군정과 이후 이승만 정권은 더 많은 경찰과 서북청년단을 제주로 보내 제주도민에 대한 살인, 강간, 약탈은 물론 고문과 테러를 저지르게 했다. 전쟁과 다를 것 없는 고통의 시간동안 당시 제주도민의 10분의 1에 달하는 3만여 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제주4.3희생자유족회

제주4‧3사건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약칭:4‧3위원회)는 2002년 처음으로 희생자 심사를 실시하여 2014년 5월 23일까지 희생자 14,231명과 유족 59,225명을 결정하였으며, 여러 자료와 인구 변동 통계 등을 감안할 때, 4·3사건 인명 피해는 2만5,000명에서 3만여 명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특히 4‧3위원회에서 심사하여 확정된 희생자의 가해별 통계는 토벌대 84.3%(12,000명), 무장대 12.3%(1,756명)로, 대부분 국가권력에 의한 학살이었다. 특히 10대 이하 어린이 5.4%(770명)와 61세 이상 노인 6.3%(901명)이 전체 희생자의 11.7%를 차지하고 있고, 여성의 희생(21.1%, 2,990명)이 컸다는 점에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은 과도한 진압작전이 전개됐음을 알 수 있다고 한 바 있다. (자료 출처: 4.3 아카이브 www.43archives.or.kr )

이덕구 산전에서 내려오는 길, 당시 초소로 활용했다는 둥그런 돌담 주변엔 조릿대가 가득했다. 앞으로 녹색순례단이 아름다운 제주의 봄날, 비경 속을 걸으며 보고 듣게 될 4.3 유적지와 그 안의 비극은 얼마나 많을 것인가.

4.3.평화기념관 전시벽에 써있던 현기영 작가의 ‘목마른 신들’중 한 구절이 떠오른다. “4.3의 슬픔은 눈물로도 필설로도 다 할 수 없다. 그 사태를 겪은 사람들은 덜 서러워야 눈물이 나온다고 말한다”
1954년, 한라산 금족(禁足)령이 해제되면서 7년 7개월 만에 끝난 제주 4.3 ‘사건’, 70주년이 지났음에도 학살의 주역들이 참회하지 않고 여전히 ‘빨갱이’ 타령을 하고 있는 지금, 우리 사회에 남겨진 과제는 아직 많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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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작성: 녹색연합 신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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