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초가 속초일 수 있는 것은 청초와 영랑이라는 두개의 맑은 눈동자가 빛나기 때문이다.”
이성선의 시 ‘속초’의 한 구절이다. 시인의 말처럼 설악산 울산바위 위에서 바라봤던 청초와 영랑은 흡사 속초의 눈동자를 떠오르게 했다. 하지만 손가락으로 그곳을 가리켰던 박그림 대표는 두 호수의 맑은 눈동자를 이제 제대로 느낄 수 없게 됐다고 말했다. 예전에는 속초 어느 곳에서나 온전한 설악이 보였으나, 고층 빌딩 숲이 들어선 이후 장벽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것은 실향민의 도시였던 속초가 관광 도시로 변화해간 과정과 무관하지 않다. 설악과 속초의 단절, 공동체 파괴, 선주민보다 관광객의 편의를 더 앞세운 개발들. 평생 수도권에서 살아왔고, 자주 관광객 입장에 서 왔던 나는 그 말들을 깊이 헤아리기 어려웠다. 설악을 넘어 속초 시내에 위치한 청초와 영랑을 직접 느껴보고 싶었던 이유다. 기대한 대로 순례 5일차에는 전날 청초를 봤던 것에 이어, 영랑을 찾아 떠나는 여정이 시작됐다.
영랑호에 도착한 순례단을 맞이한 것은 오랫동안 속초고성양양환경운동연합에서 일해왔던 김안나 전 사무국장이었다. 그의 해설에 따라 영랑호가 7천년 전부터 모래 퇴적물이 해안 입구를 막아 형성된 석호(潟湖)이며, 왜가리와 중대백로 같은 철새들의 도래지임을 알 수 있었다. 한편 기다란 부교가 호수를 절반으로 가르고 있는 것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유를 들어보니 속초시가 영랑호 북부에 위치한 장사동의 경제를 활성화 시킨다는 명목으로 2021년 11월 길이 400m의 부교를 설치한 것이었다. 7.8km 둘레를 시민들이 돌면 너무 많은 시간이 걸리니, 호수를 가로지르는 다리를 놓아 북부에서 소비를 늘리도록 하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고 한다. 유감스럽게도 부교 설치로 인한 서식지 축소, 단절로 인한 생태환경 교란, 1만km 넘게 날아와 쉬어가는 철새들에 대한 ‘계산’은 포함되지 않은 것 같았다. 설악산 케이블카와 마찬가지로 오로지 인간의 일방적 편의만이 느껴지는 인공 구조물이었다.
절반으로 갈린 영랑호를 바라보며 편치 않았지만, 한편 이 현장에서 꺼지지 않는 운동의 호흡을 느끼기도 했다. 2019년 4월 동해 고성에서부터 시작된 산불이 영랑호 철새 둥지가 있는 나무들을 덮쳤는데, 그 이후 속초시는 불에 탄 피해목들을 모두 벌채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환경 활동가들의 조사 결과 7월에도 불 탄 나무 위로 200개 넘는 둥지가 관찰되었기에, 산주들을 따로 설득해서 철새 둥지들을 지켜낼 수 있었다고 들었다. 환경운동은 활동가의 몫도 있지만, 시민과의 어우러짐이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또한 이것이 수년 간 영랑호 보도교 철거 재판을 이어온 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안나 전 사무국장은 지금도 가끔씩 철새 둥지를 지키기 위해 협조해줬던 산주들에게 안부 문자를 보낸다고 했다.
“잘 지내시죠? 여기 백로, 왜가리는 잘 지내고 있어요.”
영랑호를 떠나 숙소인 용대자연휴양림으로 가는 길, 백담사 인근 정류장에서 하반기 순례 참가자들이 합류했다. 4일간 쉽지 않은 코스를 걸어왔던 터라 지쳐 있었는데, 그들의 합류가 단비 내리듯 반가웠다. 새로 발걸음 내딛는 사람들의 힘찬 에너지가 전달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순례의 가장 큰 즐거움 중 하나는 단순히 현장을 걷는 것만이 아니라, 바로 곁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먹고, 쉬고, 이야기하며 나와 다른 우주들을 알아가는 데 있다.
글. 녹색연합 그린프로젝트팀 박상욱 활동가
* 제 24회 녹색순례는 한살림연합에서 유기농 쌀과 미숫가루를, 에코생협에서 식재료를, 철도노조에서 물품을 후원해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