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저호라는 우주 탐사선이 있습니다. 1977년에 지구를 떠난 보이저호에는 금으로 만든 레코드판과 재생기 그리고 116장의 사진이 실려있습니다. 레코드판에는 세계 각국의 언어로 녹음된 지구인들의 인사말을 비롯해 천둥 소리, 빗소리, 바람이 나뭇잎을 스치는 소리, 파도가 바위에 치닫는 소리 같은 것들과 바흐나 베토벤, 루이 암스트롱 등의 음악이 수록되어 있죠. 116장의 사진 중에는 임신한 인간의 초상, 초원의 사자, 커다란 파도가 일렁이는 바다, 웅장한 에베레스트 산과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만에 하나, 정말로 만에 하나 있을지 모르는 우주의 다른 지적 생명체가 이 탐사선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만들어낸 일종의 지구 자기소개서입니다.
과학자와 예술가와 사회학자와 인류학자와 철학자 등 여러 사람들이 심혈을 기울여 고르고 고른 이 지구의 자기소개서를 싣고 지구를 떠난 보이저호는 이제 막 태양계를 벗어났습니다. 우주의 스케일로 따져보자면 기나긴 순례의 첫 발을 내딛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애석하게도 이 작은 탐사선이 우리와 다른 지적 생명체를 만날 확률은 0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설령 다른 존재에게 발견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 의미를 잃지 않을 겁니다. 저는 지구 자기소개서를 만든 것 자체만으로 보이저 프로젝트가 역사상 가장 중요한 우주 프로젝트였다고 평가합니다. 이 자기소개서는 외계의 존재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지고 있으니까요. “1977년에 쓴 지구의 자기소개서는 이렇습니다. 지금은 어떤가요?”라는 질문 말입니다.
저는 매번 녹색연합의 이 순례를 영상으로 잘 남겨두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스물네 번째 녹색순례를 영상으로 기록하러 왔습니다. 같이 걷는 대신 차를 타고 이동하며 순례단을 촬영하고 순례지의 풍경을 촬영했습니다. 촬영을 자처한 저에게 이번 순례의 가장 큰 화두는 ‘무엇을 기록하고 남길 것인가?’였습니다. 그래서 지난 이레동안 순례단을 따라 집요한 촬영을 하면서 녹색순례의 의미를 담는데 집중했습니다. 누가 영상을 보더라도 녹색연합이 어떤 단체인지, 녹색순례가 어떤 활동인지 알 수 있는 자료로 쓰이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말이죠. 말하자면 녹색순례의 자기소개서를 만드는 일이겠습니다.
설악산 권역을 넓게 걸으며 순례단이 가장 많이 떠올린 건 아마도 케이블카였을 겁니다. 순례단이 걷는 것을 촬영하다보니 몇 해 전, 케이블카 건설 부동의 결정이 났을 때 기뻐하던 녹색연합 활동가들이 떠올랐습니다. 설악산에 케이블카가 건설되면 안 된다는 그 결정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만 그날의 당연한 기쁨은 번복되고 말았죠. ‘케이블카 백지화’라는 염원이 짙은 이유는 아마도 번복된 당연함에서 발휘되는 게 아닐까 싶었습니다.
이 순례의 기록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2024년 4월 말의 설악산이라는 시공간을 걸으며 만들어낸 가장 큰 의미는 오색 케이블카가 없는 이곳의 모습을 걸음으로 각인한다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이 순례의 기록을 통해 내일의 우리에게 말을 걸 수 있을 겁니다. 이렇게 말이죠.
“2024년 4월의 설악산은 이렇습니다. 지금은 어떤가요?”
글과 사진. 최황
* 제24회 녹색순례는 한살림연합에서 유기농 쌀과 미숫가루를, 에코생협에서 식재료를, 철도노조에서 물품을 후원해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