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녹색순례 8일차] 설악은 나, 나는 설악 ; 설악을 듣는 날

2024.05.01 | 녹색순례-2024

“자연을 아는 것은 느끼는 것의 반만큼도 중요하지 않다.” – 레이첼 카슨

저는 인제-양구 지역에서 5년 정도 군 복무를 하면서 빼어난 절경을 자랑하는 설악산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마침 이번 녹색순례단이 설악산으로 향한다고 하니 설악산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싶어 참가했습니다. 깊은 고민 없이 온 순례였지만, 순례를 통해 설악이 제게 보여준 아픔과 슬픔은 제가 설악을 끌어안고 보듬고 더욱 사랑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요? 8일을 내내 걸었음에도 헤어짐을 앞둔 오늘의 한걸음 한걸음은 무척이나 아쉬웠습니다. 애틋한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저는 순례대장이 우리에게 건넨 질문, ‘내가 포기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일까’에 대한 답을 고민했습니다. 나와 설악의 관계, 나와 자연의 관계 그리고 이 관계를 만들어주는 무수한 연결고리들을 하나 하나 되새겨보며 ‘사랑하는 것들과의 관계를 포기할 수 없다.’는 답을 내심 생각했습니다.

해단식을 위해 케이블카 하부 정류장 예정지에 도착했습니다. 정류장 부지를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나무를 베어내고 흙을 파헤쳤을까. 그리고 자신의 뼈와 살이 잘려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설악은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을까. 가슴이 시큰거렸습니다. 그 상처의 한가운데에서 녹색순례단은 마지막 묵상 시간을 가졌습니다. 푸르른 설악산 어머니의 품에서 한 마지막 묵상에서 저는 자연 그 자체가 되어보는 놀라운 체험을 했습니다.

따스한 햇살, 시원한 바람, 새들의 지저귐. 나를 비우고 자연이 주는 느낌에 몰입하는 그 순간 설악산이 온전히 나로 느껴졌습니다. 내가 설악산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설악에 깃들어 자연을 느끼는 가슴 벅참도 아주 잠깐, 곧 두려움과 아픔, 공포라는 감정들이 나를 덮쳤습니다. 내 살을 자르고 뼈를 깎아내겠다는 사람들이 점차 다가왔습니다. 따사로운 햇살 아래였지만 너무나 가슴이 떨리고 무서웠습니다. 누군가 도와주었으면 좋겠는데, 나를 살려줬으면 좋겠는데, 막아주었으면 좋겠는데 나는 소리낼 수 없었고 움직일 수 없는 산이었습니다. 그때 머릿속에 섬광이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말할 수 없고 움직일 수 없는 산인 나 말고도, 행동하고 소리 낼 수 있는 또 다른 내가 있다는 것이 떠올랐던 겁니다. 두 눈을 뜨며 방금까지 나였던 설악산을 바라보았습니다. 제 눈에서 흐르는 눈물은 두려움에 떨었던 설악산이 흘린 것인지 설악산을 파헤치려는 세력에 분개한 윤형서가 흘린 것인지 분간할 수 없었습니다. 분명한 것은 내가 설악산이었고, 내가 나를 지킬 것이라는 다짐이었습니다. 내가 포기할 수 없는 것은 ‘내 자신’이었습니다.

설악은 포기하지 않는다. 나는 포기하지 않는다.

한 명의 회원으로서 무작정 찾아와 본 녹색순례는 녹색연합 활동가들과 동고동락할 수 있는 매우 값진 시간이었습니다. 그들이 가진 자연에 대한 경외감, 열정, 사랑의 마음을 엿볼 수 있었고, 또 한없이 선하면서도 진정 강인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녹색연합이 생명을 파괴하려는 거대한 문제들과 맞서고 때로는 깊은 좌절을 느끼면서도 절대 포기하지 않는 이유가, 포기할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인지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매년 생명이 위협 받는 위기의 현장을 걸어온 녹색순례단. 이번 녹색순례를 통해 한층 더 단단해진 마음과 맑아진 정신, 깊어진 사랑이 2024년 녹색연합의 원동력이 되어주리라 믿습니다.

글. 녹색연합 회원 윤형서

* 제24회 녹색순례는 한살림연합에서 유기농 쌀과 미숫가루를, 에코생협에서 식재료를, 철도노조에서 물품을 후원해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녹색연합의 활동에 당신의 후원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