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4일 오늘, 제21대 대통령이 새롭게 당선되었습니다. 새로운 정부, 새로운 미래 앞에서 우리는 다시 민주주의를 생각하게 됩니다. 123 내란사태 후 시민들이 스스로 만든 광장의 기억이 떠오릅니다. 하지만 남겨진 과제도 큽니다. 내란의 상처를 어떻게 치유할 것인지, 그리고 기후와 생태, 환경 문제라는 거대한 시대적 과제를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지—우리는 여전히 깊은 갈등과 마주해 있습니다.
정지아 작가의 이름에는 한국 현대사의 상흔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지리산에서, 아버지는 백아산에서 빨치산으로 활동했습니다. ‘지아’라는 이름은 바로 그 두 산에서 따온 것이지요. 지금의 광장을 둘러싼 대립은, 어쩌면 1948년 여수와 순천에서 벌어졌던 비극의 그림자와 맞닿아 있는지도 모릅니다. 정지아 작가는 그 시대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요? 그리고 그는 오늘날의 민주주의를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을까요?
지난 4월 20일, 제25회 녹색순례 ‘다시 만난 민주주의, 생명의 길을 걷다’의 5일차 프로그램으로 정지아 작가를 모시고 ‘여순 항쟁’과 그의 저서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날의 깊은 대화를 인터뷰 형식으로 다시 엮었습니다. 정지아 작가의 시선을 따라, 우리는 다시 민주주의를 만납니다.

안녕하세요. 구례 사는 아줌마 정지아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작가님은 여순 사건을 다룬 강연은 잘 하지 않으신다고 들었습니다.
네. 저는 여순 사건을 직접 경험하지 못한 세대이기 때문에, 함부로 말하기 조심스러웠습니다. 다만 제 부모님은 여순 14연대 소속은 아니지만, 그 사건으로 인해 입산하신 분들이었어요. 지리산과 백운산으로 들어가셨죠. 그래서 그 후유증이 저에게까지 이어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동부 육군 지역, 즉 전남 동쪽 (여수, 순천, 광양, 구례, 곡성) 이 여순 사건으로 삶이 완전히 뒤흔들렸습니다. 6.25보다도 여순의 기억이 더 깊게 남은 곳이에요. 사건은 1948년 10월 19일 발생했는데, 며칠간 해방구처럼 존재하다가 군의 진압으로 후퇴하면서 지리산으로 입산한 이들이 많았죠. 그로 인해 좌익 세력은 신분이 노출돼 모두 산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고, 제 부모님도 그중 한 분들이셨어요.
저는 1965년생인데, 초등학교 시절까지 여순이라는 단어조차 들어본 적이 없었어요. 너무나 큰 피해가 있어서 아무도 입 밖에 꺼내지 않았죠. 구례에서 모범생으로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어른들이 저를 보고 “쯧쯧쯧” 하시는 거예요. 공부 잘한다고 칭찬하셔야 할 텐데 말이죠. 그 후에야 아버지가 ‘빨갱이’라는 말을 들었고, 그제야 이유를 알게 됐습니다. 빨갱이의 자식이라는 낙인은, 조선시대로 치면 역적의 자식이라는 의미였으니까요.
나중에는 구례를 떠나고 싶어서 엄마를 졸라 서울로 전학을 갔습니다. 하지만 공부는 점점 손에 잡히지 않았어요. 연좌제로 인해 출세할 수 없다는 생각이 강하게 자리했거든요. 결국 아버지가 성적표를 보고 자퇴하라고 하셨고, 저는 반발심에 진짜 자퇴하겠다고 했죠. 그 일로 부모님과 심한 갈등도 겪었고요. 그러다 순천으로 전학을 가게 됐는데, 그게 제 삶의 전환점이 됐습니다.
순천에서 여순 사건의 흔적을 발견하셨다고요.
순천여고 음악실은 일제 목조 건물인데, 어느 날 거기서 찬란한 가을 햇살이 구멍을 통해 바닥에 꽂히는 걸 멍하니 보고 있었어요. 좀먹은 줄 알았던 그 구멍이 총알 자국이라는 걸 음악 선생님이 알려주셨습니다. 반란 사건 때 군인들이 쏜 총알이 박힌 자국이었죠. 역사라는 것이 물리적으로 제 눈앞에 나타난 느낌이었습니다. 그때부터 교정 곳곳을 다니며 또 다른 흔적이 없을까 찾아다녔어요. 고등학교 시절을 그렇게 버티지 않았나 싶습니다.
작가님의 가족사, 그리고 『빨치산의 딸』은 많은 독자에게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
처음엔 책을 쓸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어요. 저희 부모님께서는 여순 사건 무렵부터 지리산에 입산했던 구빨치셨는데 구빨치 중에는 생존자가 거의 없어 부모님의 증언을 듣고 싶은 작가들이 많이 방문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본인의 이야기는 그 당시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였던 제가 쓸 거라며 거절했죠. 저는 그걸 몰랐는데 방문자 중 한 분이셨던 실천문학의 송기원 선생님께서 그 얘기를 듣고 저에게 책을 쓰라며 연락하셨습니다.
이 책은 사실 실록에 가깝습니다. 사건도, 인물도 모두 부모님의 구술에 기반해 쓴 글이에요. 단지 문장에 생동감을 주기 위해 묘사에 약간의 양념을 친 정도죠. 출판사에서는 소설이라고 했지만, 저는 그 책을 통해 부모님의 삶을 세상에 알리고 싶었어요. 왜곡되거나 잊히기 전에 기록을 남겨야 한다는 절박감이 있었죠.
그래서 책을 썼다는 것은 일종의 해방이었어요. 빨갱이의 딸이라는 낙인에서 스스로를 벗겨내는 과정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빨치산을 ‘나쁜 존재’로 여기는 세상에서, 제 부모님은 그렇게 단순하게 말할 수 없는 분들이었거든요. 빨치산의 딸은 그 편견과의 싸움이자, 저 자신의 한풀이이기도 했습니다.
이후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통해 다시 한 번 아버지 세대를 이야기하셨습니다. 이 책을 쓰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아버지가 2008년 5월 1일, 노동절 새벽에 돌아가셨어요. 평생 노동자와 농민을 위해 싸우셨던 분이 그 날 떠나신 걸 보며 문득, 아버지 세대가 이제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6.25 전쟁 당시 서로에게 총을 겨눴던 세대가 이제 사라져가고 있었고, 그 기억도 함께 사라질 것 같았죠. 『빨치산의 딸』이 기록이었다면,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정서적으로 그 무게를 덜어내는 작업이었습니다. 빨갱이라는 낙인이 씌워진 아버지 세대를, 인간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싶었어요. 단순히 정치적 인물로서가 아니라, 딸의 시선에서 아버지를 복원하고 싶었죠. 글을 쓰면서 제 안에 묶여 있던 감정들, 미처 다 말하지 못했던 것들을 내려놓을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어쩌면 제 인생의 족쇄를 푸는 마지막 열쇠였는지도 모릅니다.
작가님께서 여순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이 인상 깊었습니다. 이 사건을 우리가 어떻게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14연대 병사들이 남긴 선언문이 있어요. “우리는 동족을 죽이기 위해 군인이 된 것이 아니다.” 저는 그 문장이 여순 사건의 핵심을 드러낸다고 봅니다. 당시 이들은 단지 사상이나 이념이 아닌, 양심과 인간성의 문제로 그 명령을 거부했던 거죠. 그 거부는 단순한 반란이 아니라 휴머니즘의 발로였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남로당의 지시가 아니라 민중의 자발적인 움직임이었습니다. 여순, 4.3, 대구 10.1 모두가 그랬어요. 우리가 미국의 군정과 단독정부 수립에 동의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도 중요합니다. 이 땅의 민주주의는 외부가 아닌 내부의 갈등과 주체성으로 빚어진 것이라는 걸 기억해야 합니다.
광장에서도, 또 강의를 통해서도 요즘 ‘젊은 세대’와 자주 대화하실 텐데요. 민주주의 정신을 이어가는 그들에게 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으신가요?
요즘 젊은 세대가 세상을 너무 순수하게 바라보는 것 같아요. 뭔가 하나만 바꾸면 세상이 곧 바뀔 거라 믿지만, 세상은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사회주의가 실패한 것도 모두가 욕심 없이 나눌 거라 믿었던 순진함 때문이었죠. 누구는 내 것을 아껴 남에게 주지만, 누구는 내일 먹을 걸 비축합니다. 그런 차이를 인정하고 상처받지 않으면서도 공존할 수 있는 제도와 태도를 고민해야 해요. 세상엔 완벽도, 천국도 없고, 다만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만들기 위한 현실적인 노력이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고, 실망은 혐오로 이어질 수 있어요. 기대를 줄이고, 스스로를 더 객관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을 때 타인에게도 너그러워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라남도 순천시 해룡면 상내리 와온마을에 위치한 와온공원에서 정지아 작가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녹색순례 참가자들
녹색연합 회원들과 활동가들은 매년 비폭력 평화 정신을 기르기 위해 녹색순례길을 걷습니다. 운동의 선배로서 마지막으로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제가 이렇게 맨날 촌구석에서 창밖으로 자연이나 바라보며 살고 있다 보니, 이렇게 열심히 활동하시는 분들을 뵈면 늘 죄송하고, 사실 별로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하지만 80년대 운동을 겪은 사람으로서, 또 최근의 페미니즘 운동을 보면서 드는 생각이 있어요. 내가 옳다고 해서 상대가 틀렸다고 몰아붙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겁니다. 물론 전선에서는 싸워야죠. 맞서야 할 땐 맞서야 합니다. 하지만 일상에서는, 내 친구와는, 함께 가야 하잖아요.
그래서 저는 친구들에게 항상 웃으면서 얘기해요. 페미니즘이 싸우자고 하는 게 아니라, 많은 사람이 여성을 인정하고, 지금보다 더 평등한 사회를 만들자는 거라고요. 결국 중요한 건 설득이고, 끌어들이는 일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꼬셔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건 문학도 마찬가지예요. 글을 잘 쓴다는 게 뭔지는 정의하기 어렵지만, 독자가 안 넘어오면 아무 의미가 없어요. 도서관에만 꽂혀 있는 잘난 책이 되는 거죠. 그래서 저는 앞으로 우리가 어떤 운동이든 — 환경이든, 여성 문제든 — 조금 더 매력적으로, 유쾌하게 사람들을 ‘꼬시는’ 방식이었으면 좋겠어요. 그게 제 바람이고, 저도 그렇게 하려고 합니다. 제 몫까지, 여러분이 열심히 싸워주시길 바랍니다.
민주주의는 다수의 뜻에 따르되 스스로 선택한 조건이 아니라면 차별받지 않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라고 정지아 작가는 말합니다. 우리는 종종 타인의 취향이나 능력을 기준 삼아 판단하고 강요합니다. “술자리에서 제가 좋아하는 위스키를 고를 자유조차 보장되지 않는다면, 그건 민주주의가 아니겠죠.” 대한민국의 제도적 민주주의는 어느정도 갖춰졌지만, 생각보다 어려운 것은 일상의 민주주의라며, 작은 선택에서부터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태도가 민주주의의 시작임을 강조했습니다. 언젠가 정지아 작가과 위스키 잔을 부딪히며 밤이 깊도록 이야기나눌 수 있는 날이 오면 좋겠습니다.
『아버지의 해방일지』 중 몇 토막을 김유석 인턴 활동가가 읽었습니다. 노크북으로 책을 미리 만나보세요!
초연결 인터뷰 정리와 노크북 영상 제작: 홍보팀장 배선영, 홍보팀 인턴 김유석